滅種 危機의 6.25 世代 北韓統治 經驗 꼭 後世에 알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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滅種 危機의 6.25 世代 北韓統治 經驗 꼭 後世에 알려야…
  • 이경식 기자
  • 승인 2016.04.29 16: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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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이경식 기자] 요사이 北韓에 關한 記事들을 接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특히 金正恩 北韓 國防委員會 第1委員長과 關聯된 記事가 그렇다.

報道된 內容을 보면 歷代 北韓指導者中에서 南北韓을 爲해 가장 어려운 사람이 北韓을 이끌고 있는 것 같다. 本人의 姑母夫 이며 北韓國防委員會 副委員長을 지낸 國家體育指導委員長 張成澤을 國家謀反罪로 몰아 死刑을 시켰고 數百名의 指導級 人士들에 대한 피의 肅淸을 敢行하였다.

自己의 할아버지 金日成 主席 그리고 아버지 金正日 委員長도 그리 하지는않았다.

2002年 5月 13日 北韓 平壤에서 金正日 委員長을 만난 바 있는 現 朴槿惠 大統領은 就任하자 마자 北韓과의 和解와 協力를 摸索하고 關係 改善을 追求하고 여러 가지 南北共生의 길을 찾으려고 努力했지만 結局은 모두 失敗하고 及其也는 開城工團 마져 閉鎖하는 措置까지 取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南北關係가 1945年 分斷 以來 最惡의 狀態에 놓여 있는 것 같은느낌이 든다.

本誌 이번號 1面 이 紙面 바로 右側에 前에 駐北韓 中國特派員을 지낸 現駐韓 中國 法制日報 首尔支局長 單士磊(선사뢰)氏의 南北韓 關係에 關한 記事가 揭載 되어 있다.

1945年 解放直後 大韓民國 政府 樹立前 南韓의 大部分의 젊은이들은 程度의 差異는 있지만 左翼 思想을 가진 사람들이 아마도 80%는 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當時 北韓의 GDP는 約 150弗, 南韓은 그 折半도 안되는 6~70弗 그래서 北韓을 憧憬하는 사람들이 南韓에는 훨씬 많았다.

그래서 南朝鮮 共産黨 朴憲永委員長은 金日成에게 南侵을 慫慂했고, 한 달이면 ‘祖國統一’이 可能하다고 進言하여 南侵을 敢行 6.25 事變이란 骨肉相殘 韓國戰爭이 勃發했다는 말이 있다.

드디어 1950年 6月 25日 北韓 人民軍은 南侵을 始作 韓國戰爭이 始作되었고 不過 2個月도 되지 않은 짧은 期間에 大韓民國 國土의 大部分이 釜山과 그 周邊 地域을 除外하고는 全域이 共産 治下로 떨어졌다.

筆者는 共産治下 3個月에 關한 紀事를 쓴 일이 있다. 朝鮮日報가 이를 2010年 6月 29日 字에 報道를 하였다.

다음은 그 記事의 拔萃文이다.

6.25가 來日 모레라서 알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缺禮를 무릅쓰고 이 글을 드립니다.

6.25 南侵 때 서울(首尔) 市民 大部分이 江北에 남겨진 채 漢江橋가 爆破됐지요. 그래서 南下를 못한 많은 서울市民이 3個月間 共産治下에서 苦痛을 받았습니다. 그 들에게 이 ‘指導員 同務’라는 이름은 아주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아주 高位層과 잘 나가는 사람들은 南으로 避難을 갔고 漢江 以南의 사람들은 時間이 있어 거의 南으로 避難을 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數의 國會議員 등 높은 분들을 包含해서 大多數의 市民들이 南으로 避難을 가지 못 했습니다. 서울에서 共産黨 政治를 直接 體驗한 그 때 20代와 그 以前에 出生한 사람들은 只今은 이미 他界 했거나 살아있어도 85歲 前後가 되어 滅種危機에 處해있는 사람들(Endangered species)이 되어 있습니다.

그 當時 18歲였던 저도 80을 來日 모래 바라 보며 언제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記錄에 남기는 것이 重要하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지난 6월 2일 地自體 選擧 結果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進步性向의 사람들과 젊은 이들이 Twitter 等으로 서로 文字를 보내고 Follow해서 퍼나르고 그렇게 해서 막판에 野黨에게 몰표를 안겨준 結果라고 합니다.

北韓의 所行으로 確認된 天安艦 擊沈 事件으로 46名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거야!’하고 南韓을 脅迫하는 北韓의 行悖를 겪는 渦中에서 發生한 일이라 그것은 敵前分裂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습니다. 共産政治를 3個月間 直接 體驗한 사람에게 그 狀況은 萬感이 交叉하는 錯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狀況이 解放直後 美 軍政때와 어쩌면 그렇게도 같습니까!

愛讀者 여러분도 우리나라 大統領도 그리고 大多數 우리 國民이 實際 經驗해 보지 못한 일이라서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只今 70代 後半이 안된 분은 그 當時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르고 계십니다.
 
1945年에 韓半島는 日帝로부터 解放이 되고 美軍이 南韓에 進駐하여 軍政을 폈습니다. 美 軍政 治下에서는 ‘朝鮮共産黨’도 ‘朝鮮人民黨’과 ‘南朝鮮勞動黨’ 그리고 ‘民靑,’ ‘女盟,’ ‘職盟’과 ‘全評’ 등 左翼 政黨 및 勞動 社會團體들도 모든 右翼 政黨 社會團體와 마찬가지로 合法的으로 活動을 하였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 當時 左翼 支持者 들은 右翼 支持者들 보다 比較가 안될 程度로 훨씬 그 數가 많았습니다. 正確한 統計는 몰라도 그 當時 우리의 體感으로는 아마도 國民의 70% 程度가 아니 어저면 그보다도 훨씬  많은 左翼 또는 左翼 同調者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特히 靑年層은 左翼 이라고 해야 ‘인테리’로 通했으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左翼 行勢를 했지요.

한 例로, 3.1節이다, 光復節이다, 5月 1日 勞動節이다 하면 祝賀 集會가 열리는 데 右翼과 左翼이 서로 衝突과 流血事態가 發生합니다. 그래서 美 軍政廳에서는 集會를 따로 따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通常 右翼은 東大門의 서울 運動場에서 하게 하고 左翼은 南山公園에서 하도록 하였습니다. 參與率은, 놀라지 마십시요, 當時 어린 저의 記憶으로도 右翼團體의 서울 運動場에 1萬名 程度가 왔다면 左翼의 南山에는 7~8萬明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南韓은 國民 大多數가 다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뿐으로 一人當 國民所得이 單 60弗 이었으니까 勞動者의 天國 그리고 土地 無償 分配 等 달콤한 共産黨의 宣傳이 잘 먹혀 들었던 것 같습니다. 當時는 個人所得도 北韓이 南韓보다는 多少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左翼이 右翼보다 훨씬 그 數가 많았습니다.

美 軍政이 끝나고 李承晩 大統領이 大韓民國政府를 樹立하고 共産黨과 左翼이 不法化되고 活動이 制裁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活動은 地下로 숨어버렸을 뿐 活躍과 人氣는 如前하였습니다.

當時 南韓사람은 共産黨을 말로만 들었지 實際로 그들의 政治를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只今 韓國의 進步性向이 强한 사람들 特히 젊은이들 그리고 위의 Twitter들도 그 當時 南韓의 大多數의 左翼性向의 사람들과 같이 共産政治가 어떤 것인지 말로만 들었지 實際로 體驗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6.2 地自體 選擧에서와 같은 敵前分裂이 生긴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1950年 여름 마침내 6.25 韓國戰爭이 터졌습니다.
 
北韓 人民軍이 總攻擊을 開始한지 3日만에 首都 서울이 그들 손에 陷落되었고 不過 1~2個月만에 釜山과 그 周邊을 除外하고는 南韓의 全域이 그들 손에 들어 갔습니다. 南韓에 있는 左翼과 共産黨 同調者가 많았기 때문 이였을 것입니다. 南朝鮮勞動黨 朴憲永 黨首의 公言이 대충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는 金日成에게, ‘南侵하시요, 그러면 南半部에서는 自發的으로 民衆蜂起가 일어나서 짧은 期間 內에 統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意見이 다른 분도 계시지만 그 當時를 直接 體驗 한 사람의 記憶으로는 朴憲永의 壯談은 다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던 것이 3個月의 共産黨 政治로 因해 南韓(特히 서울)의 左翼과 同調者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共産政治를 받아본 南韓의 모든 사람들은 ‘이건 아니로구나!’ 하고 精神을 바짝 차린거죠.

共産治下 서울에서 아침에 新聞을 펼쳐보면 읽을 것이 없습니다. 勞動新聞, 人民日報, 民主朝鮮 等 新聞을 보면 內容이 다 똑같습니다. 먼저 金日成의 動靜이 대문짝만한 寫眞과 함께 第1面의 톱 뉴스로 나오고, ‘英勇한 人民軍隊’의 ‘赫赫한’ 戰果, ‘米帝와 南朝鮮 傀儡軍의 敗戰과 蠻行,’ 北韓 勞動者와 農民의 ‘生産 目標 120프로 超過 達成’ 等等의 記事가 거의 全 紙面을 꽉 채웁니다. 모든 新聞이 똑같고 個人이 關心을 가질 만한 Human interest story 記事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勞動黨과 政府의 宣傳 煽動 媒體이고 官報입니다. 世上이 온통 暗黑 世界 같고 가슴이 답답해 窒息할 것만 같습니다. 北韓에서의 狀況은 只今도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마찬가지 이거나 더 惡化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南韓의 左翼 또는 進步性向의 사람들은 이런 新聞 하루만 봐도 진저리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삐딱한 視覺’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막말로 韓半島가 赤化가 된다 하더라도 保守的인 사람은 忍耐心과 順從하는 傾向이 있어 살아남을 수가 있어도 批判的인 進步性向의 사람들은 斷言컨데 北韓 治下에서는 到底히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共産治下 3個月에 南韓의 勞動者와 農民들(原來 左翼思想이 强했던 階層)도 亦是 ‘이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北韓에서 派遣된 ‘指導員 同務’ 때문이지요. 그 北韓 ‘指導員 同務’는 南韓의 논밭에서 쌀과 其他 穀物 줄기에 달린 낱알을 일일이 세고 그것으로 計算해서 日帝가 그랬듯이 農民으로부터 ‘供出’을 ‘現物稅’라 하여 받아 갔습니다. 모든 벼가 다 잘 자랄 수가 없지요. 그래서 割當量을 내고 나면 남는 곡식이 없습니다.

方今 말한 北韓의 ‘指導員 동무’는 말하자면 北韓이 任命 派遣한 各級 組織의 實質的인 長인 것입니다. 共産治下 3個月이 아니고 더 길었더라면 그리고 만약에 끝이 없었다면, 南韓 國民들은 北韓 共産政權의 永遠한 ‘第2國民’으로 轉落하고 앞으로 數十年間, 아니 數百年間 또는 아주 永遠히 北韓政權의 奴隸 같은 身分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北韓은 南韓 出身은 絶對로 信任할 수가 없으며, 要職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共産 治下 3個月間 서울에서는 各級 人民위원회(只今의 各級 行政 機關에 該當) 等 모든 權力機關의 長은 形式的으로는 南韓 出身의 所謂 ‘地方 빨갱이’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그 南韓 出身 委員長 뒤에는 例外 없이 北韓이 派遣한 ‘指導員 同務’가 따라 붙습니다. 그리고 南韓 出身의 長은 허수아비에 不過하고 實際의 權力은 北韓의 ‘指導員 同務’가 行使합니다. 아마도 南韓이 完全히 赤化가 된다면 南韓出身의 左翼 指導層은 朴憲永의 境遇와 같이 肅淸이 되고 地位가 낮은 南韓 出身들은 永遠히 그들의 下手人 그리고 國民 全體는 北의 ‘第2國民’으로 絶落하여 北韓 ‘指導員 同務’의 허수아비가 될 것입니다. 日帝가 그랬듯이 北韓 政權의 南韓 出身에게는 어떤 實權도 주지 않았을 것 입니다.

共産治下 3個月間 서울에서 17歲 以上의 젊은 男女는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靑年은 ‘義勇軍’으로 잡혀갔고 處女는 ‘看護兵’으로 ‘供出’을 當하였습니다. 本人은 體格이 矮小한 데다 童顔 이라서 ‘義勇軍’을 免했는데 막판에는 그도 않되서 山속에 숨어 살면서 禍를 免했습니다.
 
共産 治下에서는 夫婦가 서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父子之間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는 媤父母나 男便보다 金日成 ‘어버이’를 더 섬겨야 하고 아들도 親父母보다 金日成에게 더 忠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反動’으로 勞動黨에 告發하고 男便은 아내 앞에서 마음속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家族 보다는 黨이 먼저이고 그보다도 金日成 과 金正一이 먼저 이기 때문입니다.

何如間 共産治下 3個月에 南韓 사람들은 精神을 바짝 차렸고 北韓은 南韓에서 左翼 同調勢力의 99%를 喪失 하였습니다. 나머지 1%의 ‘순빨갱이’는 退却하는 ‘人民軍’을 따라 北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 中 많은 數가 朴憲永과 함께 ‘米帝의 스파이’로 處刑 되거나 阿吾地炭鑛으로 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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只今 大韓民國의 一部 過激한 進步的인 사람들은 共産政治의 實體를 모릅니다. 實際로 받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지난 6.2地方 選擧에서 天安艦事件 그리고 그 무서운 北韓의 脅迫을 無視한 체 野黨을 찍은 것 같습니다.

北韓 政權의 實體를 經驗할 수 있는 두 가지 方法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北韓의 勞動新聞, 人民日報, 民主朝鮮 等 北韓 新聞을 直輸入하게 하여 그 左翼性向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國民에게 配布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個月만 보게 하면 親北 進步의 ‘단꿈’ 그리고 漠然히 憧憬한 北韓 體制에 對해 幻滅을 느끼고 理念 轉換을 할 것입니다.

두 째번 方法은 共産黨 政治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北韓 訪問을 許諾하는 것입니다. 몇 日이 아니고 最小 3個月 以上 訪北을 許諾하는 것입니다. 金剛山觀光, 開城觀光 그런 것 말고 北韓에서 長期滯留 하면서 北韓을 ‘실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體裁 宣傳을 爲해 좋은 것만 보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 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北韓이 좋다고 한다면 아주 그곳에서 살 수 있게 北韓으로의 ‘移民’을 許諾하는 것입니다. 民主國家에서 ‘居住의 自由’가 保障되는 것이 아닌가요? 南北 當局間 3個月間 歸國 保障을 하는 條件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共産治下에서 3個月을 겪은 本人의 經驗으로 볼 때 北을 憧憬하는 ‘삐딱한’ 사람들 이야 말로 앞에서도 잠깐 言及했듯이 共産治下 에서는 絶對로 살 수 없는 사람들 입니다. 그 곳에 가서도 時日이 지나면 또 ‘삐딱하게’ 나갈 것이 分明하고 그곳 에서는 그런 사람은 政治犯 收容所나 阿吾地 炭鑛 行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判斷으로 나라가 北韓 共産黨의 손에 넘어 간다면 나머지 國民은 北韓의 ‘第2國民’과 같은 奴隸가 되는 것이 너무나 抑鬱할 것입니다.

이틀 後면 6.25 韓國戰의 60周年이 되는 날입니다. 6.25 關聯 記事를 많이 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꼭 6.25 當時 3個月間 共産治下에서 ‘義勇軍’으로 끌려 갔거나 北韓 ‘指導員 同務’ 밑에서 ‘第2國民’으로 奴隸같이 살아남은 80嵗 前後 사람들의 生生한 實話를 많이 保導하여 美 軍政時와 같이 數가 늘어나는 ‘삐딱한’ 사람들에게 共産主義의 實體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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