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 호국의 영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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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정 호국의 영웅인가?
  • 편집부
  • 승인 2016.06.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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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정전 66주기에 중대장 윤필호대위를 추모하며
▲ 이근엽 교육학박사 전 연세대교수

[이근엽 교육학박사 전 연세대 교수] 한국전 정전 66주기에 중대장 윤필호중위를 추모하며
(이근엽 교육학박사, 전 연세대교수, 1995년 이래 The Korea Post 기고가. 현 한.베트남 사회과학원 원장)국내 유력 일간지의 최 모 선임기자는 다가 올 위협과 위험을 무릅쓰고 호국의 귀감으로 육사교정에 동상으로 서 있는 심일소령에 대하여 용기 있게 진실을 털어 놓았다.( 2016년 6원 12일자 조선일보 참조)
“심일 소대장 선두로 5인의 특공대가 북한군 탱크에 뛰어 올라 포탑의 뚜껑을 열어 수류탄을 던져 넣고 뛰어내리자 탱크에 불길이 일었다...”이 글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태능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서있다. 육군에서는 매년 가장 우수한 전투중대장을 선발해‘심일상(賞)을 수여하고 있다.
위의 구절은 1950년 6월 25일 춘천전투에서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이었던 심일소위의 신화의 서두다.
당시 같은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전 주월공사(현.91세)는 당시 4일간의 춘천전투를 정밀조사한 후에 “춘천전투에서 심일은 도망쳤으며 대전차포 1문을 젹에게 넘겨주었으므로 그의 중대장은 ‘심일은 총살감’이라고 했다. 그는 보직 해임되고 포병연락장교로 근무했다.
“심일은 1951년 1월 26일에 중공군에 밀려 퇴각할 때 농가에 숨었다가 중공군에 사살되었다고 탈출한 동료장교가 증언했다. 심일에 관한 위의 신화는 심일의 모친의 처절한 애원을 들은 7연대장이 부관에게 명하여 노몬한전투(1939)에서 소련군에게 괴멸되었던 일본군이 꾸며낸 무용담을 모방해서 지어내게 한 허구다. 그럼에도 1951년 10월에 심일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전사편찬위원회는 신화로 굳어진 심일 영웅담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91세의 노병 이대용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증인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달려오는 적 탱크에 뛰어 올랐다니 그 5인조는 올림픽 도마선수들인가. 탱크포탑의 뚜껑을 열었다니 검은 띠 태권도 선수들의 신기(神技)를 보여 주었는가. 적 탱크병들이 친절하게도 탱크해치(뚜껑)을 열고 수류탄을 던져달라고 부탁하던가. 부끄러운 이야기다. 이제 참 영웅 운필호중위를 말하겠다.
1951년 1월에 지원 입대하여 그 엄동설한에 고된 훈련을 받을 때에는 “빨리 총을 달라. 전방에 가 싸워서 북녘의 고향으로 가겠다”라고 외쳤다. 사기는 좀 높았던 것 같다. 곧 수도(보병)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중대장 고재일대위. 후일의 건설부장관)에 배속 된 M1 소총수가 되었다.
그해 4월에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소위 약수리) 350미터 고지에서 북한군 정예부대와 맞섰는데 고지 탈환 후에 전사한 16명의 중대 전우들의 시체를 보는 순간 필자의 생각은 “이거 죽는 데 왔구나. 잘못 왔어. 후방 갈 길은 없을 까”라는 일념뿐이었다. 죽는 데야 어떻게 하나!
1952년에 우리사단은 중부전선에 투입되었다. 기억나는 전투로는 지형능선전투, 수도고지전투(중대장 편부만대위 전상), 김화 오성산(소위 김일성고지)전투 (중대장 윤필호중위 전사), 화천군 백암산 계곡전투 (필자 전상) 등이다.
1951년 여름에 필자가 야간경계보초를 서 있는 초소로 예고없이 고재일 중대장이 찾아 와서 “이하사, 이제 교대시간이 10분만 남았다. 힘내. 이 10분 동안에 방심하면 인되.”하고 떠났다. 큰 힘이 되었다. 명 지휘관이었다. 지금 남서울에 살고계시는 그의 건안함을 기원한다.
1951년에는 전선이 형성되고 미 공군의 엄호, 미 해군의 함포사격 등으로 우리의 화력이 우세했으나, 1953년 휴전 직전에는 북한군과 중국군의 화력이 막강해졌다.
1952년 가을에 윤필호중위가 중대장(대리?)으로 왔다. 그는 필자가 북녘출신이라 가끔 필자를 중대장 방커로 불러 북녘 이야기도 들어보고 자신이 경남 함안군 가야면 사람이며 진주농림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지난 7월 5일에 필자는 윤중위의 족하를 만났는데 그는 윤중위가 후에 국립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했으며 1학년 때 갑종간부학교에 지원  입학하여 임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다정다감했던 중대장이 또 필자를 불러 자신이 일주일간 휴가 갔다 왔으며 함안군 가야면의 초등학교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말했다. 또 금년에 휴전이 성립되면 결혼할 것을 기쁘게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1953년 1월 15일(날자와 장소는 국립 서울 현충원 기록)의 야간전투는 특히 치열했다. 김화군 원남면 우리 대대진지로 북한군이 총공세를 감행해 왔다. 몇 년 전에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안 사실인데 이때 북한군 총 지휘관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최측근인 최룡해의 부친이었으며 게릴라전에 능한 최현장군어었다고 한다.
하늘을 날아가고 날아오는 무수한 포탄의 섬광, 작렬하는 적 포탄과 낙하하는 포탄파편과 돌맹이 소나기, 맹목적 M1 소총사격, 저 멀리 적의 함성, 참호에 업든채로의 수류탄 투척, 쓰러지는 전우들. 동틀 무렵에 적은 물러가고 이어 미공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중대장 방커 내에는 본부요원들과 함께 윤필호중위도 전사해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굳게 쥔 채로....머리는 거의 없어졌다. 아마도 그 많은 적 수류탄 탓이었으리라.
추측하건대 벙커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적들에게 카빈 소총으로 저항하다 실탄이 떨어지자 권총으로 대항했고 최후에는 대검으로 저항하다 전사한 것이다. 약혼식을 올리고 1주일 만의 비극이다.
지난 6월 7일에 필자는 실로 63년 만에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윤필호중위의 묘소를 찾았다. 관리소에서는 전사자 명단에는 있으나 시체는 없어 묘가 없으며 충혼탑 내에 위폐가 있다고 했다. 계급장만 한 위폐들은 모두 까만 바탕에 이름이 선명하나, 윤필호대위(일계급 특진했으리라)의 위폐는 색이 바래서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난 63년 동안 그의 유족 중 그 누군가가 얼마나 자주 와서 위폐를 만지면서 통곡했길래 이지경이 되었으랴. 현충원 기록에는 전사지 김화, 원남과 날자 만 나와 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지난 6월 19일(일요일)에 청량리- 동두천- 연천-전곡-백마고지를 지나 김화군의 한 오피(OP 작전지휘소)에 올라갔던 이유다. 행운이었다. 바로 군사분계선 건너편의 그 오성산(김일성고지)의 위용, 그 앞의 사투를 버렸던 삼각고지 능선 등.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나 63년이 지났건만 이곳 강산 은 옛 그대로다. 그 때의 초토화되었던 들과 산악은 지금 초목이 무성해 녹색천지다. 윤필호중위는 이 근처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융필호중위와 전우들의 영령에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이 강산의 평화도 기원했다. 아침이면 아침 마다 종달새의 애절한 울음은 저들의 영혼을 깨우리라.
필자의 부대는 휴전 전에 화천군 백암산 쪽으로 이동했다. 우리야 M1 소총을 쏘는 것이 업이었으니, 즉 거대한 전쟁기제(機制} 속의 한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전쟁의 동향을 알 길 없었으나 느낌으로는 후퇴였던 것 같했다.
1953년 7월 13일(이날은 잊지 않고 있다} 백암산 계곡 야간전투 중 필자는 적 포탄 파편상으로 후송되어 부산 제5육군병원(금일의 국립부산대의대부속병원)에서 치료받고 일계급특진으로 육군하사로서 명예제대했다. 필자의 제대는 필자의 연세대학교 입학과 동시 발생이었다. 한국군이여 잘 있거라!
필자가 전상을 입었던 화천군 백암산 계곡은 바로 가요“비목(碑木)의 현장이다. 2010년 6.25 60주년을 맞아 강원도에서는 이곳에 비목 추모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이곳도 찾아가야지.
히말라야 등반에 오른 문재인 야당 더 민주 전 대표가 인터넷에 “우리 군 일부 고위 지휘관들은 연전 연패해 전선을 무너뜨리고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지휘하던 군단이 궤멸되고 전선을 무단 이탈한 지휘관도 있었다...”는 글을 올려서 일부 보수세력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문 전 대표의 언급은 맞는 말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몇 년 전에 모 일간지에서 읽은 바가 있는데 현 정부의 국무위원들 중에는 군 복무를 필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예외는 국방부장관 이라고 했다. 문 전 대표는 한국군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 낙하산대원이었다. 그의 발언은 한국의 국방태세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고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지휘관들, 육사교정에 동상이 있는 심일소령 등과 대검을 쥐고 장열하게 전사한 윤필호중위 등 중 어느 쪽이 진정 호국의 영웅인가.

후기: 1996년에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은 윤필호즁위를 포함한 이학교 재학생 한국전(1950-53) 23명의 전사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약혼녀는 후에 결혼하여 지금 80대의 고령을  누리고있다.

   

▲ 왼쪽에서 두번째. 윤필호 대위

   
▲ 서울대학교 신입생때의 윤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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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티별애 2016-10-04 18:15:21
이교수님의 산 증언 잘 보았습니다.
뒤늦게나마 진실을 알려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윤필호대위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께 경의를 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