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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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 김정숙 기자
  • 승인 2016.12.2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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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김정숙 기자]  신문사로 출퇴근하던 시절, 을지로3가역에서 늘 2호선과 3호선을 갈아탔다. 무심코 지나던 그 환승통로 한 구석에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평생의 시 한 편을 만났다. 그 시를 읽은 다른 사람들도 아마 나처럼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숨이 턱 멎는 듯한 그 강렬한 한 줄.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조병화, ‘천적’)

그때도 지금 같은 연말이었다. 나는 그때 일과 거취 문제에 대해 고뇌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우연한 이 발견이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 가장 값진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던 것이다. “그래, 문제는 바로 내 안에 있었던 거다.” 매일 그 시를 보면서 마음을 다지곤 했다

얼마 전 을지로3가역에서 환승할 일이 생겨서 그 시가 있던 자리를 살펴봤다. 보이지 않았다. 나만의 보물을 잃어버린 듯한 진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한 줄은 이미 보석처럼 내 마음 속에 박혀 있다. 은유와 환유의 언어가 빛나야 할 시에 생뚱맞은 ‘천적’이라는 생물학적 용어, 그 당돌하고도 도발적 제목이 바로 이 시가 주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적(天敵·natural enemy)은 잡아먹는 동물을 잡아먹히는 동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개구리와 뱀, 진딧물과 무당벌레 같은 거다. 우리말로는 좀 무섭지만 ‘목숨앗이’라고 한다. 천적은 생물계에 있어야 하는 먹이사슬의 관계다. 모든 생물은 대체로 천적이 있고 상대 생물의 무제한 번식을 막는 역할을 해서 자연의 평형이 이뤄지고 있다.

천적이 상대의 생물을 전멸시킬 수는 없다. 다만 개체수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시킨다. 만일 어떤 천적이 상대를 궤멸시키면, 천적 자신도 먹이결핍 때문에 자멸할 것이다. 생태계는 참 경이롭다. 천적 말고도 경쟁, 공생, 기생 관계도 있다. 악어와 악어새, 집게와 말미잘처럼 서로 도움을 주는 공생은 좋다. 고약한 것은 참나무에 붙어 사는 겨우살이 같은 기생이다. 생태계도 인간세상, 인간관계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천적이 없는 유일한 생물종은 인간이다. 인간은 도구와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미 오래 전에 동물과 식물을 대다수 제압했다. 바이러스만은 아직 제압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나의 천적은 나라고 시인은 읊지 않았을까. 천적이 없는 인간의 유일한 천적은 바로 인간일 수밖에 없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자연계 먹이사슬의 천적이 아닌, 비유적 의미의 천적인 것이다. 언론에선 숙적이란 의미로서 천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한국 축구의 천적은 일본, 이세돌의 천적은 커제라는 식이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의 천적은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였다(두 사람은 대선 과정에서 말로 서로를 물어뜯었다). 

“나의 천적은 나”라는 말은 철학적 종교적 함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천적은 결국 오욕칠정이 복잡하게 얽혀 꿈틀거리는 내면에 있을 것이다. 내 안의 천적을 보는 건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정면으로 직시하고 대결하는 것이다. 천적의 정체를 깨닫는 과정은 성찰과 구도일 것이며, 그 정체를 알아냈다면 그건 득도의 경지와 다름없을 것이다.  

시 ‘천적’에는 ‘결국’이란 부사가 붙어있다. 너무 늦은 깨달음에 대한 시인의 회한일까. 시인은 이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문학수첩에 쓴 ‘세월은 자란다’라는 산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구라파 여행을 마치고, 파리에선가, 런던에선가에서 탄 대한항공기가 캐나다 북쪽 그린랜드 상공을 통과하고 있을 때, 황무지 같은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저런 언 동토에서도 생명들이 살고 있을까,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서로 잡아먹고 살게 마련인 서로간의 천적이 있을 법인데, 저런 살기 어려운 곳도 천적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럼, 너의 천적은 누구란 말인가’하는 생각으로 이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이어지자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닌가’하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나를 살리고, 죽이고, 망치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천적은 나 자신’, 이렇게 결론을 수긍하면서 참으로 긴 내 인생, 그 천적을 잘도 이겨내면서 잘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곤 했습니다(중략).”

한 줄짜리 시 ‘천적’을 더 짧게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닐까. 모든 것은 오롯이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결국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온갖 조화를 부려 욕망과 절망, 시비와 선악을 가져오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한다. 불시불 돈시돈(佛視佛 豚視豚)이라 했다. 부처님 눈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엔 돼지가 보인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세모는 누구에게든 반성과 명상과 각성의 시간이다. 내 안의 천적은 무엇인가, 그걸 화두로 잡고 묵은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글쓴이: 한기봉 국민대 초빙교수/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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