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자랑스런 한국인 한민족 동포대상에 성영기전 유한공사 동사장 남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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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자랑스런 한국인 한민족 동포대상에 성영기전 유한공사 동사장 남영기
  • 김정미 기자
  • 승인 2017.11.09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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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최상의 품질과 자신감으로 글로벌 시장을 넘보고 있는 정직한 경영혁신기업

[코리아포스트 김정미 기자]성실하게 일하면 하늘의 길도 열린다.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겠다고 정하고 매일 자신을 되돌아보아 변화를 이루고 성공을 이루어 낸 사람이 있다.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이루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2017. 자랑스런 한국인 한민족 동포대상은 7백20만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바른 국가관과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고 국가 브랜드 가치를 선양하고 재외동포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분을 한국 신문기자 연합회에서 소정의 과정을 거쳐 시상하고 있다.

해외 각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기업을 이끌어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세우고 있는 기업인들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진다. 직장인으로서 47세에 창업하여 12년 동안 300명의 직원과 200억/년 이상 매출을 내고, 이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중국시장을 점유해 갈 성영기전 유한공사 남영기 동사장의 성공 신화를 만나보길 바란다.

어려웠지만 꿈을 잃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남영기 동사장은 초등학교 5학년 전까지는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공무원이신 아버지의 퇴직으로 모든 생활이 궁핍해졌다. 퇴직금으로 작은 집을 지었으나 벌이가 없었던 터라 곧 쌀집 주인에게 외상값 대신 집을 넘겨주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이웃의 빈터를 얻어 판잣집을 지어 살면서 교과서는 형님이 쓰던 것을 물려받아야 할 정도로 모든 생활이 궁핍해졌다. 아버지 퇴직 후의 삶은 많은 교훈과 시련을 주었다.

초등학교 성적은 상위권으로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유달리 체육 점수를 잘 받지 못해 곤욕을 치루어야 했다. 오후에 턱걸이 연습을 하기 위해 철봉대에 매달려 있는데 친구들이 장난으로 쳐서 팔을 구부렸다 펴니 거짓말처럼 몸이 솟구치게 되어 배치기로 턱걸이를 7개나 하게 되었다. 그 때 선생님께 칭찬을 듣고 ‘노력하면 되는구나’ 하는 성공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경야독으로 치열하게 생활했던 시간들

남영기 동사장은 중학교 졸업 후 하루 일당 150원을 받고 스크린 인쇄 공장에 뒷 심부름하는 직공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즐겁고 성실하게 일한 것이 사장님 눈에 띄어 2년 회사 다니고 난 후 야간 학교에 가게 되었다. 월급의 몇 달치인 2만 3천원을 학교에 내고 졸업장을 받아 용기를 얻어 원서를 한독 직업 훈련원에 제출하여 합격하여 엔지니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독 직훈 2년을 졸업하고 기계직종인 자격증 다듬질 2급 기능사를 취득하여 군 특례가 가능한 창원공단 삼성 라디에터에 입사했다. 직장 생활 중 배움에 대한 열망은 계속되어 마산공고 특별 학급에 1기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3년을 주경야독으로 뛰면서 시간을 초로 나누어 사용하였다. 이때 목표는 창원 기능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1급 자격증을 따야해서 밤잠 안자가며 공부했다. 추운 겨울 외투를 걸치고 매일 공부량을 정하고 진도를 나간 결과 3수 끝에 기계제도 1급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마산공고 졸업 1년 후에는 꿈에 그리던 기능대학을 자랑스럽게 입학하게 되었다.

창원 공단에서 군 특례를 받으며 2년을 근무했고 5년 동안 마산공고와 기능대학을 졸업하며 매우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 특례를 마치니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오고 다른 직장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다. 이 때 남 동사장은 안씨 문중의 맏딸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다. 군 특례 기간에 함께 근무한 동료의 여동생으로 간간히 봐 왔으나 끌림이 있어 몇 번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던 것이었다.

LG전자와의 운명적 만남

남영기 동사장은 창원에 오기 전에 라벨 만드는 베짜는 공장과 인쇄하는 공장에서 4년을 근무했고, 창원에서 8년을 근무하여 경력이 남달라 LG에 특채 입사하게 되었다. 금형 설계와 Press 금형 기능 보유자로서 대졸 사원보다 경력을 2년 더 인정받았다.

서로 자기 부서로 데려가기 위한 이견이 있었지만, 금형 공장이 아닌 제품 사업부인 회전기 ( 세탁기, 가습기 등)를 직접 선택했다. 매미처럼 선만 긋는 일 (설계를 빗대어 하는 말)만 하지 말고 새로운 project를 맡아서 해 달라는 당시 사업부 공장장 말씀에 매료되어 제품 사업부로 와서 금형에 관해 밀렸던 어려움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당시 남 사장은 부품 과장을 했고 금형과 관련 있는 판금 용접과 도장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남자직원 430명을 주야로 관리하였다. 매우 긴박하게 매일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제조 라인에 공급할 부품을 생산해서 차질 없이 공급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는데, 당시 현장 노사분규 진원지의 부품 과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람을 키운다

먼저 남 사장은 관리자로서 무엇이 문제인지 함께 풀어가 보려 했으나 현장 사원들의 경계심은 대단했다. 우선 현장의 불합리를 개선코자 팀을 짰다. 사원들이 힘들어 하는 일부터 모두 개선한다는 생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구석구석 개선해 나갔다. 효과가 큰 것부터 했는데 도장 Jig를 구멍에 끼우는 방식에서 자석으로 붙이는 구조로 샘플을 만들었다. 특공대를 조직하여 10여일에 걸쳐 주야로 전체 도장 Jig를 바꾸었다.

당시 남 동사장에게는 산전수전을 겪는 아픔도 있었는데, 도장 설비를 연료비 절감을 목적으로 간화식에서 직화식으로 바꾸면서 가스체크가 발생하여 도장 도막이 박리 불량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손실이 매우 커서 본사에 보고되자 그 책임으로 회사를 사직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결국 생산 기술부서와 싸움 끝에 설비를 다시 간화식으로 바꾸면서 정상적인 생산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때의 아픔이 많은 공부가 되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남 동사장이 부품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일을 재미있어 할 무렵, 조립라인을 제조하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여사원이 반인 부서에 가게 되어 부끄러움도 많이 있었다고 하나 노사분규 후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해 현장 일에 참여하는 개선학교를 만들어 수학해 보았다.

또, 신입사원이 자주 바뀌면서 현장의 불량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인을 살펴보니 개인의 작업자가 부품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립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 직무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어서 계장급 한 사람과 여사원을 두고 직무교육센터를 창설하여 의무적으로 그 과정을 거쳐 현장 일을 하도록 하자 품질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남영기 동사장은 대기업 관리자 생활은 후회 없이 했다 싶을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일량을 감당해냈고 큰 획을 긋는 일들을 많이 하였다. 현장 개선을 위해 직접 현장을 구석구석 살피고 그늘진 곳은 밝게 개선하고 직원들과 일심동체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어려운 공정은 모두 쉽게 하였고 지금보다 더 많이 시간당 생산 수량을 가질 수 없는가 의문을 가지고 개선하고자 노력했고, 공장관리에 있어 4M(설비, 사람, 작업방법, 재료)에 신경을 썼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생각하고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고 많은 추억을 남겼다.

그러나 LG의 관리자 생활은 항상 남 동사장에게 뭔가 허전함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의 나이에는 이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단하게 남 동사장을 얽어매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나, 어떤 계획을 가지고 가야 하나’ 등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즐겼다.

남영기 동사장은 현장 근로자도 능력을 갖추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과장 급료만큼 받는 현장사원도 나오곤 했다. 기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즈음에도 노조와의 대립은 계속 되었다. 현장 사원들과 노조 대의원들에게 공부하는 관리자 상을 심고 싶었다. 남 동사장은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 방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품질관리기사, 프레스 금형설계 기사 1급, 금형 기능장 3가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하면 하늘이 돕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나이 36살이 되던 해에 품질관리기사 합격은못했지만 모두 합격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천진에서의 생활

어느덧 남 동사장의 회사생활은 30대 후반을 맞이하여 달리게 되었다. 당시 제조 2과를 맡아 중요한 OTR생산과 가스렌지를 포함한 고급 모델을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 매일 많은 일에 지칠 무렵 중국 S법인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막 LG가 중국 사업을 진행하려 할 때 생산이 본격화 되면서 제조 전문가인 남 동사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업부에서 보내주지 않으려 하니 남 동사장이 가겠다고 나서서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남 동사장이 직접 나서서 하니 일 진행이 일사천리로 되었다. 그는 1996년 8월 23일 천진에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개방과 함께 시작된 중국의 변화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호텔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루 숙박료가 직원들 한 달 급료보다도 높은 곳에서 별천지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천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산을 맡은 직원들은 훈련이 되지 않은 직원들이라 현장에서 다스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중국말을 배우려 A4크기의 종이를 명함크기로 접고 거기에 깨알같이 우리말, 중국말, 병음을 표기해서 늘 들고 다니며 고함치듯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였다.

당시 한국은 IMF를 거치면서 급료가 학비와 맞물려 환율이 요동치면서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한국의 어려움은 심각했으나 남 동사장은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버텨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문화가 다른 국가에서 사람 속에서 성과를 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4년여 동안 중국에서 지내면서 머리 속이 점점 비게 되는 것 같아 이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그의 모습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이 43세에 21세기를 준비하고자 과감히 사표를 내게 되었다.

가야할 길은 이 길

남영기 동사장은 엘지를 그만 두고 대전에 정착해 일을 해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라믹을 다이야 몬드 힐로서 가공해서 세라믹 부품에 인공 다이아몬드를 숙성해 증착시키는 반도체 웨이프를 가공하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혁신 방안을 고안해냈다. 엄청난 효과에 기대를 걸고 밤낮주야 매달려 샘플을 안고 샌프란시스코 반도체 전시회에 참석했다. 그 메이커 역시 매우 반기며 혁신안을 비밀스런 자리에 안내하여 상담을 시작했다.

그러나 엄청난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든 샘플도 양산 공정을 갖기엔 힘들어 보였다. 결국은 준비된 자금도 양산 계획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의견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 즈음 천진에서 회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아 다시 천진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개인회사는 사장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게 되어 있었다. 매출 제로인 회사를 노력해서 매출 700만¥(10억원규모 /월)으로 만들어 놓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남 동사장이 일구어 놓은 그곳에 권한이 없었다고 한다. 함께 일한 K관리자를 사퇴시키라는 사장 지시를 되받아치며 그는 그 자리에서 미련없이 나왔다.

2004년 7월, 여러 제의가 들어왔으나 남 동사장은 스스로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일을 준비했다. 가진 건 너무나 빈약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있는 것을 하고 싶어 도장 라인을 짓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사업 승인을 내고 공장 임대비를 그동안 급료를 모아 두었던 데서 꺼냈다. 공장 폐수 처리장을 삽질하며 모여 회사 이름을 정하고 경영 이념을 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준비해 나갔다. 자신의 능력과 성실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길은 열릴 것이라 믿었다. 첫해 경영은 일거리가 없었으나 60K밖에서도 일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 납품을 하였다. LG 회사는 2차 벤더를 자청했고 그러면서 신뢰를 얻어 6개월 만에 거래선 등록을 LG에 하게 되었다.

당시 도장에 대해서는 많은 업체가 Capa가 남아도는 현황이었는데 그래도 잘 아는 것을 하자는 생각으로 임하자 점차 일거리가 많아지게 되었다. 매출이 운영자금으로 기여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초기자금이 조달이 어려워 직원들 급여가 일순간 부족한 적이 있어 빌린 적도 있었다.

사업 초기에는 남들과 달리 풍부한 경험이 있어 순조롭게 운영이 되었고 한국의 처남도 퇴직금 가불로 힘을 보탰다. 틈틈이 환율이 좋아져 급료 받았던 것을 한국으로 보내고 한국에서 공장도 짓고 하였으나 역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때 남 동사장은 계속 꿈꾸며 새로운 변화를 진취적으로 꿈꾸며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전했다가 성공하지 못한 항목도 눈에 띄었다. 전착도장, Door 생산, 히터의 제품 사업 등. 그러나 남 동사장은 그것이 실패였다기보다는 결단이었고 빠른 판단으로 손실을 극소화시켰다는데 위안을 받았다. 사업을 하자 시간이 여유로와진 반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속 안주를 하면 언제 서서히 무너질지 모른다는 중압감이 그를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한다.

남영기 동사장은 직장인으로서 47세에 창업을 해서 12년 동안 300명의 직원들과 200억/년 이상이 매출을 냈다.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중국 Local 시장을 점유해가는 상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결국 남 동사장의 지난 시간들을 보면 20대에 준비했고 30대에 몰입했고 40대에 새로운 도전을 하여 50대에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과정에서 LG와의 만남은 후회없이 젊음을 태우는 많은 경험을 하는 훌륭한 학습이 되었다.

24세에 1급 자격증을 따서 기능대 입학을, 36살에 프레스 금형 설계 1급과 금형 기능장을,48세에 창업을 위한 준비를 모두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남 동사장이 평생 쌓아온 성실함과 자신감, 신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남 동사장은 사업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는 모든 이들에게 우연하게 오지만, 계기가 어찌되었든 그 순간 자기 승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꿈꾸며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정확한 방향을 정하여 몰입하고, 기회를 잡았을 때 성공 체험 사례를 통해 배우며,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해 본다면 모두가 신바람 나는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어도 그것이 약이 되고 돈 주고 산 경험이 되고 수업료를 냈다고 보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지금의 시간을 보기보다는 5년 후, 10년 후를 그리며 준비한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영기 동사장의 성공 신화를 통해 우리 모두 긍정의 사고와 도전 정신을 배워 성공 체험을 해 본다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남 동사장의 정직하고 열정적인 도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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