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태동시킨 파리외방전교회, 조용히 창립 360주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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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태동시킨 파리외방전교회, 조용히 창립 360주년 맞아
  • 김영목 기자
  • 승인 2018.09.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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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한글판 김영목 기자] 활동 그 자체가 한국 가톨릭의 초기 역사였던 프랑스의 한 선교단체가 있다.

1658년 교황청 직속으로 설립돼 올해로 창립 360년을 맞은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가톨릭의 역사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과 한국에서 펼친 선교의 역사와 그대로 겹쳐진다.

1660년부터 지금까지 파리 외방전교회가 아시아로 보낸 4천500여 명의 선교사 가운데 360명이 조선과 한국 땅을 밟았다.

외방전교회의 활동으로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배출되는 등 성직자들이 양성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가톨릭은 박해 속에서도 급성장을 거듭했다.

외방전교회가 선발하고 교육해 한국으로 보낸 프랑스 신부들은 초대 브뤼기에르 주교에서부터 1942년 노기남 대주교가 10대 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110년간 9대에 걸쳐 교구장 직을 이어받으며 한국 현대 가톨릭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회뿐만이 아니다.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사제들의 전방위적 활동은 근대화를 늦게 시작한 한국의 의료·교육·문화의 큰 축을 담당하면서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대표성당인 명동성당과 약현성당도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코스트 신부가 19세기 말 설계하고 지은 작품이다.

외방전교회의 선교 과정에서 조선 말의 가혹한 박해는 프랑스 신부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1839년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목숨을 잃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9명이 순교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 처형된 천주교인은 1만여 명에 이른다.

프랑스는 조선의 자국 선교사 처형에 항의해 군함을 보내 강화도에 상륙, 도성을 약탈하고 외규장각 문서들을 강탈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 가톨릭 그 자체이자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큰 축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치열하고도 끈질겼던 활동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잘 아는 학자나 성직자, 소수의 가톨릭 신자뿐이다.

▲ 사진=프랑스 파리 7구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건물.(연합뉴스 제공)

한국의 산업화·민주화가 이뤄지고 한국천주교도 급성장하면서 교회조직이나 사회공헌에서 외방전교회의 역할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30년 넘게 활동하다 2013년 귀국해 파리외방전교회의 사무총장을 맡은 홍세안(미셸 롱상·72) 신부는 지난 2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 만나 "요즘 한국인들이 우리 외방전교회를 잘 모르는 것은 우리 역할이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했다.

홍 신부는 "세례자 요한이 '그분(예수)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도 옛날에 한국서 눈에 띄는 큰 역할을 했지만, 한국 교회가 이만큼 컸으니 우리는 작아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외방전교회는 현재 한국에서의 일반 사목을 대부분 접은 대신, 10명의 소속 신부가 외국인 노동자나 수감자, 병원 등 특수 사목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교회는 10년 전 창립 350주년 행사를 꽤 크게 한 뒤 올해는 지난 7월에 조촐하게 360주년 행사를 했다. 이달과 내년 1월에도 전교회의 역사를 되짚는 소규모 세미나가 예정돼 있지만, 떠들썩한 행사는 아니다.

파리 시내 7구의 상업지구 한복판의 화려한 백화점과 카페 거리 사이에 있는 외방전교회는 이곳이 종교시설임을 알 수 있는 정문 위 성모상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매년 사제와 신자들이 꾸준히 외방전교회를 방문해 신학 교육을 받거나 순교자들을 기린다.

명동성당 신자들은 지난 2003년 외방전교회 정원 한쪽에 한국순교성인현양비를 세웠다.

바로 옆의 팔각정에는 한국과 중국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의 이름과 생몰년도, 출신지가 적힌 현판도 있다.

팔각정은 선교사들이 파견될 때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동료들과 인사를 했던 자리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천주교가 한창 박해받을 때 바다 건너 선교사의 순교 소식을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듣게 된 파리의 신학생들은 선배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던 정원에 다시 모여 '테 데움'(Te Deum·감사의 찬가)을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테 데움을 부를 일은 없겠다는 기자의 말에 홍 신부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선배 사제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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