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最古)의 기업 두산 자산 30.2조원 으로 국내 랭킹 1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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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最古)의 기업 두산 자산 30.2조원 으로 국내 랭킹 13위
  • 박병욱 기자
  • 승인 2018.11.19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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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요 기업군 스터디 시리즈(1): 두산그룹

[코리아포스트 박병욱 논설위원(부사장)]

“두산은 이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인프라 지원사업(ISB)을 중심으로 38개 국가에 약 4만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박정원 회장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기업인 두산은 122년의 긴 역사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유례를 찾기 힘든 과감한 혁신으로 빠른 변화를 추구했고, 그 결과 괄목할 성장을 이뤘습니다. 두산은 이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인프라 지원사업(ISB)을 중심으로 38개 국가에 약 4만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자산 총액 기준 30.2조원으로 자산총애 기준, 대한민국 기업집단 서열 13위인 두산 그룹 박정원 회장의 말이다.
지난 122년간 두산그룹은 일취월장하여, 현재는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대한민국의 대표적 기업집단(Business Conglomerate)중의 하나이다.

▲ 두산타워 본사

창업주는 1864년 6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이매리에서 태어난 박승직. 그는 1950년 12월 20일 타계할 때 까지 당시에는 드문 86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가 1890년경 ‘박승직 상점’이라는 상호로 서울 배오개에 진출하였다. 1916년부터 부인 정정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장품을 만들어 팔았으며 1920년에는 그것을 그 유명한 ‘박가분’이라는 상표로 등록했다. 이후 1925년에는 회계처리를 근대화하는 체제로 바꾸면서 상호를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변경했다.
“오늘의 두산을 있게 한 원천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자의 마음으로 걸어갔던 창업 정신이 두산의 DNA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20여년이 나잔 오늘, 그 기업을 이어 받은 박정원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 두산 창업주 박승직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은 그룹의 창업주인 박승직씨가 "쌀을 한 말(斗) 두 말 쌓아서 큰 산(山)을 이루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참으로 착실한 사람의 신념 같다.
두산그룹은 구한말인 1896년 8월, 매헌(梅軒) 박승직씨가 한성부(서울) 종로에서 박승직 상점으로 시작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된 기업이다. 다만 두산은 업종 변경과 단절 기간이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을 중시하는 다른 기업을 꼽기도 한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는 동화약품과 닌텐도가 있는데 동화약품은 1년 늦은 1897년에, 닌텐도는 7년 앞선 1889년에 설립되었다. 조흥은행 역시 1897년에 창립되었는데 지금은 신한은행으로 합병되면서 동화약품과 신한은행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업이 된 상태다.
설립 당시에는 포목점으로 시작, 1920년대에는 '박가분'(朴家粉)이란 화장품을 히트시켜서 10여 년간 떼돈을 벌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두산그룹의 2대 회장인 연강 박두병씨는 삼양사의 창업주인 수당 김연수로부터 기린맥주의 국내 판매업체인 쇼와기린의 지분을 받으며 주류 생산에 뛰어 들었다. 그 쇼와맥주가 후에 이름을 바꾸어, OB맥주가 되었다. 1960년에는 뉴스통신사인 합동통신사도 인수해 1980년 언론통폐합 때까지 언론사업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술소재사업,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 주로 경공업 위주의 포트폴리오로 짜여져 있었다. 이 당시 계열사가 병뚜껑을 만드는 삼화왕관, 코카콜라를 유통하던 두산음료, OB맥주같은 소비재 기업이었고, 폴로 랄프 로렌의 수입사로도 유명했다. 한때는 유가공사업(두산유업)에 손댄 적도 있었다. 1982년에 프로야구단인 OB 베어스를 창단하였다.
1991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두산그룹 계열사였던 두산전자가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발생시켜 낙동강 라인인 대구 및 경북, 부산 및 경남 지역으로부터 불매 운동 대상이 되어 매출에 커다란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당시 두산그룹은 OB맥주, 코카콜라, 버거킹, KFC(SRS코리아), 네슬레, 코닥, 3M 등 소비재 사업을 주로 하던 기업이였으며 이런 재화들은 최종 소비자에게 브랜드 이미지로 어필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낙동강 페놀사건 때 불매 운동의 주 타겟은 OB맥주였다. 두산그룹은 이 사건을 거울삼아 최종 소비재 기업을 탈피, B2B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코닥필름, 한국3M 등 외국계 기업의 지분을 1996년에 매각하고 1997년에는 코카콜라를, 1998년에는 OB맥주 등 소비재 사업을 매각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수합병과 비주력 사업부문 매각을 통해 우리가 알고있듯이 중공업, 플랜트 기업으로 변했다.
2000년대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두산이 보여준 행보는 그야말로 공격적이다. IMF 전에 그룹을 이끌던 박용성 전 회장의 걸레론,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이기 때문에 사지 않을 것이다'라는 인수합병에 대한 생각에 따라 돈 되는 주력 기업들, 국내에서 영위하던 해외 프랜차이즈 식당 기업들과 종가집 김치까지 몽땅 비싸게 팔아넘기며 실탄을 장전했다.
이후 두산그룹은 2001년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중공업 그룹으로의 토대를 마련했는데, 이때 5조원의 자산가치를 가진 한국중공업을 3,057억 원에 두산에 민영화하면서 헐값매각이니 특혜니 하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한 두산은 해외에서도 엄청난 인수 러시를 벌이면서, 급성장을 거듭하였다.
2005년 미국 AES社 미주지역 수처리사업 (現 두산하이드로테크놀로지), 2006년 영국 미쓰이밥콕 (現 두산밥콕), 2006년 루마니아 IMGB (現 두산IMGB), 2007년 미국 잉거솔랜드사 밥캣[14] 등 3개 사업부, 2007년 미국 CTI, 중국 연대유화기계, 2008년 독일 물류장비 전문업체 ATL(現 두산목시), 그리고 2009년에는 체코 발전설비업체 스코다파워등을 인수해 건설중기, 해수 담수화, 발전 플랜트 분야에서 상당한 내공을 쌓게 되었다.
이 외에도 원전설비 세계 1위인 웨스팅하우스가 매물로 나왔을 때 두산도 물망에 올랐었지만, 결국 도시바가 홀라당 가져가 버렸다.
두산은 2008년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였다. 두산은 중앙대 인수 후 박용성 회장이 직접 이사장을 맡아서 구조조정에 나섰다. '학문단위 재조정'의 명분으로 기업식 구조조정을 단행해서 사실상 학과 계열을 대폭 페지, 축소하고 경영경제계열를 대규모로 확대하는 개편을 단행했다.

2011년 포츈지 선정(매출기준) 두산그룸은 세계 500대 기업에 489위로 이름을 올렸다.
2018년 중국건설시장 수요 증가로 인해 두산인프라코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룹의 골칫덩이던 두산밥캣도 2010년대 들어 흑자전환으로 돌아서며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고 있고, 지주회사 (주)두산도 자체사업 부문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두산그룹은 크게 7개의 자체 사업군을 영위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계열사를 종속회사로 두고 있기 때문에 연결기준의 실적은 곧 두산그룹 전체의 실적이다. (주)두산의 14년 별도기준 실적은 매출 1조9,954억원, 영업이익 2,564억원으로 사업보고서에 나온 사업부문의 실적을 합친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다른 사업분야가 있거나 내부거래의 중복 등을 제거하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

두산그룹 박정원회장 메시지: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기업인 두산은 122년의 긴 역사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유례를 찾기 힘든 과감한 혁신으로 빠른 변화를 추구했고, 그 결과 괄목할 성장을 이뤘습니다. 두산은 이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인프라 지원사업(ISB)을 중심으로 38개 국가에 약 4만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오늘의 두산을 있게 한 원천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입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자의 마음으로 걸어갔던 창업 정신이 두산의 DNA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언제나 젊음의 패기로 122년의 역사를 이어온 두산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젊은 기업입니다.
두산은 탄탄한 사업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건실한 경영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늘 시장을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부단한 혁신과 핵심기술 확보를 통한 근원적 경쟁력 제고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두산의 임직원은 끊임없이 올라가는 눈높이와, 가용한 자원을 모두 동원할 줄 아는 현명한 근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강력한 사람들의 따뜻한 집단’을 지향하는 두산의 사람 중심 경영은 두산을 한층 더 밝은 미래로 이끌 것입니다.
두산은 주주가치 극대화에도 변함 없는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두산의 지배구조는 지주회사 전환 이후 한층 안정되고 투명해졌습니다. 지주회사 뿐 아니라 자회사에 이르기까지 이사회 중심의 경영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두산 임직원들은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두산’을 향해 각자의 자리에서 기업가치 극대화와 고객만족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서 롤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갖고 한 발 앞서가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두산이 그 동안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주주와 고객 여러분의 아낌없는 신뢰와 성원 덕분입니다. 그 믿음과 성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항상 주주와 고객,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를 생각하면서 세계 속의 자랑스러운 두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영진:

▲ 박정원 두산그룹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서울 대일고/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미국 Boston University 경영대학원 졸업
1985 두산산업㈜ 입사
1994 오비맥주㈜ 상무
1999 ㈜두산 대표이사 부사장
2001 ㈜두산 대표이사 사장
2005 두산산업개발(現 두산건설) 부회장
2007 ㈜두산 부회장
2009 두산건설 회장(現)
2009 두산베어스 구단주(現)
2012 ㈜두산 회장
2016 두산그룹 회장(現)
 

▲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

 

 

 

 

 

 

 

 

 

 

박지원 두산그룹 부회장
주요 약력
서울 경신고/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1988 동양맥주 입사
1997 두산상사 이사
1999 ㈜두산 상무
2001 두산중공업 기획조정실장/부사장
2007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2009 ㈜두산 사장/COO(Chief Operating Officer)
2012 ㈜두산 부회장/COO
2012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CEO
2016 두산그룹 부회장(現)
2016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회장/CEO (現)

 

▲ 동현수 ㈜두산 대표이사 부회장/ 사업부문 총괄

 

 

 

 

 

 

 

 

 

 

동현수 ㈜두산 대표이사 부회장/ 사업부문 총괄
주요 약력
서울 경복고/서울대 섬유공학 석사
미국 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고분자공학 박사
1983 제일모직 입사
2001 제일모직 전자재료사업부장 (상무보)
2012 ㈜두산 전자BG장(사장)
2015 ㈜두산 사업부문 총괄(現)

 

▲ 김민철 (주)두산 부사장

 

 

 

 

 

 

 

 

 

 

김민철 (주)두산 부사장
주요 약력
충북 운호고/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1989 두산 입사
2006 (주)두산 상무
2011 (주)두산 경영전략 전무
2018 (주)두산 부사장/ CFO(Chief Financial Officer) 現

두산그룹의 재계 랭킹:

순위

기업집단명

동일인

계열회사수

자산총액(조)

1

삼성

이재용

62

399.5

2

현대자동차

정몽구

56

222.7

3

SK

최태원

101

189.5

4

LG

구광모

70

123.1

5

롯데

신동빈

107

116.2

6

포스코

(주)포스코

40

79.7

7

GS

허창수

71

65.0

8

한화

김승연

76

61.3

9

농협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49

58.1

10

현대중공업

정몽준

28

56.1

11

신세계

이명희

39

34.1

12

KT

(주)케이티

36

30.7

13

두산

박용곤

26

30.5

14

한진

조양호

28

30.3

15

CJ

이재현

80

28.3

16

부영

이중근

24

22.4

17

LS

구태회

48

21.0

18

대림

이준용

27

18.7

19

S-OIL

에쓰-오일

3

15.2

20

미래에셋

박현주

38

15.0

21

현대백화점

정지선

28

14.3

22

영풍

장형진

24

12.3

23

대우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5

12.2

24

한국투자금융

김남구

30

12.0

25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26

11.9

26

효성

조현준

52

11.7

27

OCI

이수영

23

11.3

28

KT&G

(주)케이티앤지

9

11.0

29

KCC

정몽진

17

11.0

30

교보생명

신창재

14

10.9

31

코오롱

이웅열

39

10.8

32

하림

김홍국

58

10.5

33

대우건설

(주)대우건설

15

9.7

34

중흥건설

정창선

61

9.6

35

한국타이어

조양래

17

9.1

36

태광

이호진

25

8.7

37

SM

우오현

65

8.6

38

셀트리온

서정진

9

8.6

39

카카오

김범수

72

8.5

40

세아

이순형

21

8.5

41

한라

정몽원

19

8.3

42

이랜드

박성수

30

8.3

43

DB

김남호

20

8.0

44

호반건설

김상열

42

8.0

45

동원

김재철

22

8.0

46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23

8.0

47

태영

윤세영

48

7.9

48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12

7.7

49

네이버

이해진

45

7.1

50

동국제강

장세주

10

7.0

51

메리츠금융

조정호

8

6.9

52

넥슨

김정주

22

6.7

53

삼천리

이만득

17

6.5

54

한국지엠

한국지엠(주)

2

6.5

55

금호석유화학

박찬구

11

5.8

56

한진중공업

조남호

7

5.7

57

넷마블

방준혁

26

5.7

58

하이트진로

박문덕

12

5.6

59

유진

유경선

71

5.3

60

한솔그룹

이인희

19

5.1

박두병 두산 그룹 초대 회장:
박두병 (朴斗秉, 1910년 10월 6일-1973년 8월 4일)은 두산그룹의 초대 회장이자,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의 창립자인 박승직의 아들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호는 연강(蓮崗)이고, 일제 강점하의 조선 경성부(京城府) 출신이다.
1910년 10월 6일, 경성부 (서울시) 출생으로1932년에 경성고등상업학교(京城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조선은행(朝鮮銀行)에 입사해 5년 근무했다. 1936년, 부친이 경영하는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해 경영자로서의 첫 출발을 하였다.
광복 이후에 미쓰비시 그룹의 이와사키 히사야가 경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昭和麒麟麥酒會社, 기린 맥주 조선 지부)를 인수하여 (주)동양맥주를 설립해 현대적 경영인으로 부상했다. 이후 두산산업, 동산토건, 두산기계 등을 설립하여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고, 1966년에는 경영난에 빠졌던 합동통신사를 인수하여 언론계에도 사세를 확장했다.
1967년부터는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大韓商工會議所) 회장을 3차례나 연임하고 그 밖에 많은 공직과 사직을 맡아 공인으로써의 활약을 하였다.
생전에는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60년대에 맥주산업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무역, 기계, 포장, 식·음료 등 각종 연관사업에 투자함으로써 해당 산업 분야에서 최고 기업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모두 13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하며 두산의 매출액을 349배 성장시켰다.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1]는 믿음 아래, 대한상의의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1967년부터 본격적인 국제 활동을 시작하여 외자 도입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실했던 선진국의 자본을 유치하고, 선진국과의 기술 협력을 이루어 내기 위해 태평양 경제 위원회(太平洋經濟委員會, PBEC) 참여를 적극 모색하여 한국은 1969년 10월 PBEC에 옵저버로 가입할 수 있었다.
1970년에 개최된 제3차 정기총회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두병은 한국인 최초로 1970년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등을 대표하는 아시아 상공 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임중이던 1967년부터 1973년 사이 정부의 협조를 받아 상의에 '산업합리화 운동본부'를 신설하여,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기업 체질의 개선, 산업 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제고하기 위한 합리화 지침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두산은 박두병이 사망하고 5년 뒤인 1978년, '국가 발전의 원동력은 교육'이라는 유지에 따라 연강재단(蓮崗財團)을 설립하고, 민족 문화의 창달과 각종 장학, 학술 및 문화 사업에 지원하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근자성공(勤者成功)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영 이념은 "기업 경영에서 지름길을 찾지 않는다.", "고객중심", "품질을 최우선으로 한 장인정신", "인화정신", "참된 기업인은 자신이 진출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내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의 기업과 우리나라 상공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농축되어 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박문회(朴文會) - 별세
할머니 허씨(許氏) - 별세
아버지 박승직(1864년 - 1950년) - 별세
어머니 정정숙 - 별세
본인 박두병(1910년 - 1973년) - 별세
부인 명계춘(1913년 - 2008년) - 별세
장남 박용곤(1932년 -) : 두산그룹 명예회장
손자 박정원(1962년 -) : 두산그룹 회장
손자 박지원(1965년 -) : 두산중공업 회장
차남 박용오(1937년 - 2009년) - 별세
자부 최금숙
손자 박경원(1964년 -) : 전 성진건설 부회장
손자 박중원(1968년 -) : 전 성진건설 부사장
삼남 박용성(1940년 - )
손자 박진원(1968년 -)
손자 박석원
사남 박용현(1943년 -) : 두산건설 회장/연강재단 이사장
손자 박태원(1969년 -) : 두산건설 부회장
손자 박형원
손자 박인원
오남 박용만(1955년 -) :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자부 강신애
손자 박서원
손자 박재원
육남 박용욱(1960년) : 이생그룹 회장
장녀 박용언
동생 박우병(1915년 - ?)
동생 박기병(1917년 - ?)
동생 박규병(191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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