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재회(再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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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재회(再會)
  • 이근엽 박사 전 연세대학교 교수
  • 승인 2019.04.0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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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한국전(1950-53) 노병(老兵)의 63년 만의 만남

[코리아포스트 한글판 이근엽 박사 전 연세대 교수] 2016년 8월 초에 영문 월간지 ‘The Korea Post’ 발행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6.25 한국전 때 자기 아버지를 구해준 그 분이 이 교수님이 아닌가 싶어 통화하고 싶다는 여성의 전화가 왔는데 전화번호를 알려주어도 되겠는가 하는 전화였다. 좋다고 했다.

여성의 이야기는 이렇다. 필자가 ‘The Korea Post’에 쓴 글 “Who Are the True Heroes of the Korean War?”(2016년 7월호) 와 그것의 인터넷 한글판을 읽어 보았는데 전쟁터가 강원도 김화지구였고 소속이 수도사단 제1연대에다 전투 날짜가 7월 13일 임으로 그 전투에서 자기 아버지를 구해준 그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혹시나 해서 전화한다는 것이었다.

▲ 사진=2016년 10월 18일, 채규락 전 대위(오른쪽, 93세)와 외근엽 전 중사(87세)가 63년 만에 재회 했다.

필자는 부친의 이름을 물었다. “채규락 입니다.” “기억 안 나는데. 연세는?” “지금 94세입니다.” “아, 그러면 대 선배님이신데. 직책은 무엇이었나요?” “예. 제1연대 군목장교 였습니다.” “제1연대 군목장교? 아...... 잠깐만..............맞다. 맞다. 나요. 나.” “아버님은 지난 60 여 년간 우리 2남 3녀에게 그분의 생사는 알 수는 없으나 꼭 찾아보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The Korea Post 7월호 인터넷 판에서 이 글을 찾아보고 전화한 것입니다. 저는 둘째 딸입니다."

“아버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용인시 애버랜드 근처에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화 바꿔드릴게요” ......“아- 이 중사. 나요 나 채규락이요.” “예. 여기 이근엽입니다. 채 대위님.“ 필자의 생각이 63년 전으로 달려간다.

1953년 7월 13일 밤,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 졌다. 소대장이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 수도사단이 포위되고 있다. 각자 즉시 후퇴하여 제2방어선에서 재집결하라!!” 고 명령하달 하곤 고지를 뛰어 내려갔다. 약 3Km쯤 달렸을까? 우측 약 500m 지점의 연대본부 천막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저것들, 전선이 무너진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연락전선이 끊어졌나? 뛰어가서 알리자”고 마음먹고 후퇴대열에서 뛰어나가 그 쪽으로 뛰어가다가 첫 번 째 벙커의 문을 걷어차고 “밀려온다. 후퇴하라.” 고 소리치니 누가 나왔다. “누구냐.” “2중대 이근엽 중사다. 무너졌어. 밀려온다.” “나 연대군목 채규락 대위다.”

연대본부를 향해 뛰어가는데 본부 근처 여기저기서 따발(기관)소총 소리가 들린다. “앗, 기습 받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뒤돌아 정신 없이 뛰어 제2 방어선에 도착해서 중대에 합류했다. 필자가 연대본부로 뛰어 갔던 진짜 목적은 내 고향 두 살 후배 김봉현 하사가 제1연대 기수(旗手)였는데 그를 구하기 위함 이였음을 자백(自白) 한다. 그는 그날 밤에 전사했다.(서울 국립 현충원 기록)

이날 밤 전투에서 필자는 부상을 입어서 앰뷸런스로 경기도 포천의 제1 이동외과병원에 후송되고, 여기서 미군 헬리콥터로 경기도 연천역으로, 다시 병원열차로 부산에 있던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 후 학창생활, 교직생활을 하던 약 10년 동안은 채규락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운명도 생각 해 보았지만 그를 망각한지가 근 50년이 지났다.

2016년 10월 18일에 용인시 에버랜드 근처 전대리로 그를 찾아 갔다. 94세의 나이에도 매우 건강한 그는 직접 차를 운전하고 수원에 나가 점심부터 사 주었다. 그간의 이야기는 태산이다.

1953년 7월 13일 밤에 전황의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완전무장하고 연대본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이근엽 중사의 문을 박차며 “무너졌다. 밀려온다. 후퇴하라.”는 소리를 듣고 잠든 사병을 걷어 차 깨우고 연대 차량창으로 뛰어 내려가 스리쿼터 트럭에 몇 사람이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기독교 성서적(聖書的)으로는 이 중사는 주의 종 채규락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사자(使者) 였다고 의미를 붙였다.

그는 1958년에 소령으로 제대하고 수원 남문 박, 수원 공항 동쪽 공동묘지 근처에 천막 교회를 세워서 20년 만에 수원에서 손꼽히는 수원 남부교회로 키웠다. 그도 그 전투 때 후퇴하라고 외치고 연대본부 쪽으로 뛰어 갔던 그 사병의 운명을 알 수 없었고 이름도 잊었다. 그 사병이 없었더라면 자기는 사살되었거나 북으로 끌려갔을 운명이었을 것이 라는 생각에 그는 늘 그를 찾으려는 생각을 해 왔고 자녀들에게 꼭 찾아보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지난 7월 13일에 96세의 나이에 용인에서 직접 차를 몰고 서울 반포 필자의 집으로 오셔서 필자를 태우고 종로 3가 <국일관>에 가서 우족탕을 함께 들며 1953년 7월 13일을 기념했다.

11월 10일에 채목사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요새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는데 자신이 사망하면 수원 남부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므로 필자에게 조사(弔辭))를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이는 그의 유언이라고 말씀 하셨다. 비장(悲壯)한 마음으로 수용했다.

1953년 7월 1일에 그는 강원도 김화지구 지옥의 전선 수도사단 제1연대로 지원 전속 받았다. 요새 기독교회에 세습하는 목사들이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그는 수원 남부교회의 오늘날을 있게 하고 정년으로 깨끗이 손을 떼시고 물러나서 20 여 년 간이나 암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잘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그는 63년 전의 생명의 은인 이라고 필자를 찾아 왔던 것이다. 공.맹(孔.孟)의 규범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랜 우리시대에 의인(義人) 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가. 경북 영일인(迎日人) 채규락 소령(목사)가 바로 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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