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별똥별'] 시간을 거슬러 오른 과거로부터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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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별똥별'] 시간을 거슬러 오른 과거로부터의 여행
  • 이해나 기자
  • 승인 2019.12.2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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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한글판 이해나 기자] 지난 1996년 등단한 박민형 작가가 첫 단편소설집 ‘별동별’을 발표했다.

소설집 ‘별똥별’은 ▲서 있는 사람들 ▲황달수 연구 주임 ▲금색종 ▲뒤꿈치 들기 ▲화해 ▲성주 가는 길 ▲젓가락 ▲참을 수 없는 웃음 ▲별똥별, 9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박 작가는 이와 관련해 “오래전 창작한 작품도 수정하지 않았다”면서 “소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설들을 써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별똥별’의 9개 단편소설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마지막 작품 ‘별똥별’의 소재가 2014년 세월호 사건임을 기억하면, 작가의 이야기는 약 이십여년 동안 ‘시간’이라는 이름 안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을 출판한 경진출판사는 “별똥별에 묶인 아홉 편의 작품은 허구의 진실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면서 “이 소설집 문장의 회화성은 연극의 장면을 연상시키게 한다. 즉, 희곡의 소설화를 읽게 만들어 준다. 아홉 편의 작품마다 일상의 평이함 속에 박민형 작가만의 순한 지혜의 눈뜸을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홉 편의 단편 속에 박민형 작가는 백지의 마음을 펼치고 있다. 큰 기대를 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9개 단편 소설에 대한 출판사 서평 내용>

서 있는 사람들

이 소설은 부분 희곡의 문양을 곁들인 차별성의 창작방법이 돋보인다. 연극과 현실의식이 넘나드는 인생 단면 그리기가 그것이다. 누운 사람들, 앉은 사람들, 서 있는 사람들. 사람의 생은 누구나 이 과정을 산다. 그렇게 우리는 인류사 속을 생을 짊어지고 지나간다.

박민형의 등단작 창작정신은 부드러우면서 힘이 세다. 실로 문학의 내재율을 이만큼 구축하기가 드물다. 어떻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치열성이 창작의 구성방편이고 주제의식인데, 생의 아픈 이면을 말하는 시선이 너무도 담담하다. ‘상납금을 주고 낸 유리문 햇빛이 양심을 살인하는 현장에 서 있는 나, 아니 우리에 대한 묘사는 소설과 연극이 접목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등단작 <서 있는 사람들>은 박민형의 사람 마음 그리기의 수작으로 문학의 순도가 높다. 나는 그 문학의 순도를 곱씹으며 단순 자유한 심경이 된다. ‘한국 사회 정황 소설이 세계 인류의 부조리한 실존을 아우르며 아파한다. 젠장의 인류사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 있는 사람은 투명하다. 저쪽 이쪽 어둠을 지나가는 투명이다.’

황달수 연구 주임

모든 연구는 전문성을 지닌다. 교사가 받는 촌지에 대한 연구도 그 나름 명리에 따른 명분론이 있다. 그러나 선생, 학생, 학부모 심리가 삼각관계의 이해타산으로 어떤 작용이 생겨나면 뒤틀리기 마련이다. 여기 6학년 10반 황달수 주임교사의 우체국장상 수상 학생 선정의 경우 촌지 받는 합리화명분론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교육자 사회도 물질의 욕망 앞에 도덕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한편 김진만 교사는 딱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환경인데도 학부형에게 받은 촌지를 학생 편에 돌려보내며 교사의 도에 대하여 만리장성의 편지를 써 보낸다. 이 두 축의 촌지 교육환경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처럼 학교의 선생, 학생, 학부형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인 산법을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답은 독자의 몫으로 돌릴 뿐이다.

황 주임은 촌지만 받을 뿐 자신의 불양한 양심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촌지 받는 엘리트 교사로 당당할 수가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허구의 촌지에 대한 사실론이 생겨난 것이다. 황 주임은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촌지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까 내숭을 떠는 교사들에 비해 황 주임 자신이 훨씬 인간답다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심사를 이 지경까지 까뒤집어야 하는 작가의 창작 의도가 신과 사람을 내통하게 한다.

금색 종

금색 종이 달린 유리문 서점에 가면 두 여인이 있다. 한 여인은 서점주인 정애, 청소년 상담교사이고, 다른 여인은 그녀를 돕는 친구 형자다. 두 사람 이야기가 의식의 흐름을 타고 물 흐르듯 자연하다.

금색 종소리를 문장으로 듣게 할 수 있을까? 작가의 화두는 답한다. 무형의 소리를 시각화하는 묘사의 문장으로 가능하다. 바람이 울리는 종소리, 사람이 울리는 종소리, 생의 단면을 모자이크화로 그려 보이면 거기 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회 현상은 선과 악의 교직으로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그 인연의 인과적 실상을 문장으로 써냄으로써 금색 종소리는 실어증 형자의 말문을 열고 있다.

문학을 담보하는 소설은 허구 속으로 들어가는 문에 금색 종을 달아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한다. 박민형은 그 종을 달아 소리를 듣는 소설을 쓰는 데까지 이르렀다.

뒤꿈치 들기

옹골차고 기가 센 딸년, 어머니가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서른을 넘긴 나는 성깔에 맞는 월간 ≪만남≫의 취재 기자가 되었다. 1970년대 산업화에 밀려난 노동자, 1980년대 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람, 혹은 희생된 인물과 그 가족들을 심층 취재해 나는 기사를 썼다. ≪만남≫은 개혁을 자처했던 투사들을 포장해 표지에 내세운 상업성으로 성공한 잡지였다. 나는 서서히 잡지의 상업성을 높이는 기사를 쓰며 양심의 가책이 없다. ‘어차피 세상일이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가 아니던가?’ 하면서도 현실에 안주하며 타협에 물들어 있는 나를 정화시켜 줄 수 있는 남자의 만남을 바랐다.

세상 만남은 오염투성이지만 정화의 만남이 있어 신의 형평성이 이것인가 한다. 군사정권의 삼청교육대 피해자 종수의 선한 눈빛의 만남은 눈먼 양심의 일깨움이자 정화의 만남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려졌다’가 아닌 ‘그려지고 있다’의 진행형인 까닭은 희망사항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각성하려 들지만 잡지의 속성에 이끌려 진흙밟기를 꺼려 뒤꿈치 높이 쳐들며 걷는 기사를 계속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의 암시가 희망적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버린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멀리 월악산 끝자락이 오도카니 떠 있었다.”(120쪽)

군사정권 패악의 후일담을 감추듯 드러내는 박민형의 소설 쓰기가 정일하다. 선한 거죽의 삶이 얼마나 뻔뻔스런 위선인가. 속 알맹이가 투명하게 그려짐에 따라 사실소설의 진면목이 돋보이게 그려졌다.

화해

서른세 살 은수가 위암으로 죽어가며 버리고 떠난 엄마와 화해하는 이야기다. 박민형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소설의 이름으로 사람 존명을 명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두 살 위 은수 언니다. 환청인가 내 귀를 의심했다.

‘엄마’

내가 은수의 보호자이듯, 은수 또한 내 보호자였다.

“뚜껑을 열어보았자 닫는 일만 있을 겁니다.”

은수에게 남겨진 전 생애는 고작 삼 개월이라고 했다. 엄마는 은수 곁에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시간을 달라고 은수에게 사죄할 수 있는 시간을. 은수의 뼈 마디마디에 가시처럼 걸려 있을 어머니라는 존재. 은수가 저렇게 된 탓이 어디 어머니뿐이던가.

“엄마가 많이 다녀가셨어.”

“알아.”

“어떻게.”

“냄새로.”

은수가 후후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143쪽)

은수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아득한 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은수 이마에 내 입술을 포갠다. 따뜻하다. 편안히 자고 있는 은수 옆에 나도 눕고 싶다.

소설 <화해>의 뒷부분에서 발췌한 짧은 글이다. 냄새로 아는 혈육, 어머니의 피와 살은 화해의 정서를 낳는가? 그렇다.

성주 가는 길

순전한 사랑의 성을 쌓았던 고향 성주.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소년 소녀의 향기를 뿜는 사랑 이야기라면, 박민형의 소설 <성주 가는 길>은 장년 남녀의 향기를 뿜는 사랑 이야기다 할 것이다.

머슴의 주인에 대한 죽기까지의 충정은 주인의 사랑이 만든 것이다. 업둥이로 자란 만석이 자기를 거둔 할머니의 손녀딸에게 충정을 바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박민형의 창작의식을 거치면 그야말로 허구의 진실이 되어 독자의 심중을 울린다.

손녀딸 나는 다섯 살, 어린 머슴 만석은 열세 살, 자연한 주종관계의 정서가 음과 양의 원초적 사랑을 낳았다. 나는 만석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운 아픔을 달랬다. 허리가 버들강아지처럼 낭창낭창한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심한 하혈 끝에 눈을 감았다. 목숨을 담보로 나를 세상에 내보낸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하는 만석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광음과 싸우며 건너온 날들이 있고, 마침내 나는 그의 손을 두 번 다시 놓지 않겠다는 듯 꼭 쥐고 있다. 이렇게 시정 저잣거리의 이야기는 소설을 낳는다.

젓가락

젓가락을 들여다보면 젓가락이 철학을 젓가락질하는 것이 보인다. 젓가락은 짝을 이루는 두 개의 키가 같다. 그 손가락 지팡이가 생명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일을 한다. 젓가락에 생각을 접목하면 진리의 말들이 철학을 낳는다. 까닭은 젓가락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구별 없이 평등하게 먹이어 키우기 때문이다. 젓가락 철학만 제대로 깨우쳐도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질 수 있다.

박민형에게는 그만의 작가적 특성이 있다. 놀라운 글쟁이의 시선이 그것이다. 젓가락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가 이렇게 소설이 된다는 것은 그만의 평범성이 비범성을 넘어서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이처럼 창작 사유의 경계가 자유로울 때 소설은 문학으로서 유장하다.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여 독자의 사유를 돕고자 한다.

작가란?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없이는 아예 글을 쓰지 말라던 늙은 교수의 얼굴이 언뜻언뜻 거리고만 있었다. (208쪽)

그저 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했던 젓가락이었다. 내 자신과 내 가족만을 위해 나는 수없는 음식들을 집어 올렸을 것이다. (209쪽)

나만의 사용도구였던 젓가락은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그것으로 어찌 타인을 배려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가?

의좋은 형제처럼 어깨를 겨루고 있는 젓가락이 순간, 현요(眩燿)스러워지는 듯했고 미처 깨닫지 못한 내 해망쩍음을 해득시키는 듯했다. (209쪽)

그렇다. 젓가락이 선을 베풀어 먹일 때 사물의 경계를 넘어선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그 빛은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의 무명을 밝힌다.

참을 수 없는 웃음

사람의 몸속, 마음속 감성을 자극하면 속수무책의 웃음이 솟아난다. 그 웃음 보여주기의 소설이 <참을 수 없는 웃음>이다. 이 이야기의 웃음이 향하는 방향은 어딘가? 사람의 부조리한 실존이다. 작가 최고 창작의 경지는 웃음을 쏟아내는, 울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것이다. 시각 미각의 통시성으로 남녀를 묶는 웃음의 끈을 만든 박민형은 그 끈에 묻어난 웃음이야말로 ‘웃음 뒤쪽의 웃음까지 웃게 한다’를 설파했다.

결혼은 생의 꿈 이루기다. 이룬 꿈의 무지개가 지고 결혼은 이혼을 낳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병인 여인과 재혼을 결행한다. 그리고 나의 친구 효순은 사진가의 꿈을 이루고자 어린 자녀의 양육권을 남편에게 넘기고 이혼했다. 그렇다면 결혼은 행복의 산실, 불행의 산실이기도 하다. 효순의 재혼은 익살과 해학의 웃음으로 배꼽이 빠진다.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의 가능이다. 내 항문을 틀어막고 있는 똥을 위생 젓가락으로 파낸 남자여서, 효순의 재혼에 대한 변이다. 이 우스운 해학의 변으로 나는 아버지의 불가해한 재혼을 이해하는 눈을 뜬다. 사람의 실용성, 이것이 문제다. 웃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기에.

별똥별

‘천문우주센터 관측팀장이 물었다. 여긴 왜 오셨어요? 긴 머리 여자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왔다. 별이 된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하지요? 아이들이 왜 별이 되었는데요. 팽목항……. 여자는 뒷말을 삼켰다. 팀장 남자의 가슴이 헉 소리를 냈다. 남자의 눈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제가 온 것은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려고요. 사과를요? 네, 저 혼자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요. 그날 아이들과 함께 갔더라면 이런 죄책감은 없었을 것 같아요. 여자는 아이들을 잃은 그날부터 시간이 정지되었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망원경 앞에 세우고 곧 별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주저하지 말고 별이 된 아이들에게 인사하세요. 하지만 별이 된 아이들에게 함께 별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는 절대 하지 마세요. 여자가 외쳤다. 얘들아! 살아서…… 꼭 끝까지 살아남아서 너희들이 왜 별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할게. 여자의 말이 큰 소리가 되어 우주를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똥별들이 화답이라도 하듯 소리 없이 쏟아져 내렸다.’

팽목 바다 울음을 사람 마음의 노래, 우주의 노래가 되게 한 소설 <별똥별>의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