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투자 광풍이 불었던 지난 2017년~2018년과 비교해 암호화폐 위상이 달라졌지만, 우리 정부는 암호화폐가 여전히 '잘못된 길'이라고 한다.
미국 월스트리트가 암호화폐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관련 상품을 내놓는가 하면, 테슬라 등 글로벌 기업이 수익 극대화를 위해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이 때, 우리 정부는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들일 수 없다'는 의견을 고수하며 여전히 우왕좌왕이다.
◇미래 금융의 주역 '암호화폐'…글로벌 금융기관·기업 '눈독'
지난 14일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사이트 코인베이스가 나스닥 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상장 첫날 시가총액은 653억9000만달러(마감가 기준)로, 이는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보유한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의 시가총액(660억달러)과 맞먹는 규모다.
코인베이스 상장은 최근 글로벌 암호화폐 시장의 성장세와 연결된다.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각국 중앙은행이 전례 없는 통화 완화 정책을 펴게 했다. 이에 암호화폐는 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한 헤지(위험회피) 수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글로벌 기관·기업은 암호화폐가 인터넷과 블록체인을 통해 새롭게 조성될 경제적·금융적 가치에 대한 담보물이 될 것으로 평가하며 성장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다. 피델리티와 JP모건 등 미국 월스트리트는 암호화폐 관련 서비스를 속속 출시했고, 3억5000만명의 글로벌 이용자를 보유한 페이팔은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으로 채택했다.
암호화폐를 바라보는 글로벌 시장의 시각이 변하면서 비트코인에 이어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암호화폐)의 몸값은 줄줄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막대한 시중 유동성이 암호화폐 시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2017년 '가즈아' 광풍 재현?…다시 분 韓 암호화폐 투자 열풍
암호화폐 산업을 향한 기대감은 국내 시장에도 반영됐다. 최근 국내 암호화폐 거래대금은 유가증권시장을 뛰어넘었다. 23일 오후 5시30분 기준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사이트(빗썸, 업비트, 코인원, 코빗)의 일 암호화폐 거래대금은 28조4375억원(코인마켓캡 기준)으로 코스피 거래대금(15조3876억9500만원)을 뛰어넘었다.
암호화폐 거래시장의 몸집이 커지면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자, 국무조정실은 지난 19일 "암호화폐 가격상승을 이용한 자금세탁, 사기 등 불법행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4월~6월을 '범정부 차원의 특별단속기간'으로 정했다.
그러나 '투자자 보호'를 강조한 정부 방침에 투자자들의 불만은 거세지는 모양새다. 투자자들은 정부가 관련 제도 정비 없이 암호화폐 거래 산업을 회피하며 원론적인 이야기만 내놓고 있다고 지적한다. 암호화폐 관련 컨트롤타워는 경제부처가 아닌 국무조정실이 맡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7년 암호화폐 대책 주무부처는 금융위원회와 법무부였지만, 2018년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의 '암호화폐 거래사이트 폐쇄' 발언 직후 혼선이 커지면서 국무조정실이 사령탑을 맡고 있다. 업계에선 "경제 부처가 아닌 시장 상황도 모르는 국무조정실이 암호화폐 대책 주무부처를 맡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여기에 정부가 '암호화폐는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점도 투자자 불만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5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암호자산이 지급수단으로 제약이 아주 많고 내재가치가 없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역설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암호화폐 열풍에 따른 투자자 보호 대책을 묻는 여야 의원들에게 "가상자산(암호화폐)을 사고파는 사람이 '투자자'인가"라고 되물으며 "저희가 보기에 (암호화폐는) 투기성이 강한, 한국은행 총재의 말대로 내재가치가 없다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세금 걷을 때만 적극적?"…암호화폐 투자자 '분통'
세계적으로 암호화폐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우리 정부는 암호화폐를 어떻게 바라볼지조차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암호화폐 과세에 대해서는 주식·파생상품 등 금융자산과 형평성을 고려하면서 시장관리 측면에선 금융상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정부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장치 마련에 소극적인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암호화폐와 관련된 법안은 암호화폐 거래사이트를 대상으로 하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안이 전부다.
지난 3월25일부터 시행된 특금법 개정안은 국내 암호화폐 거래사이트 등(가상자산 사업자)을 '금융회사'로 보고 암호화폐를 이용한 자금세탁과 테러 자금조달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다만 금융당국은 특금법 개정안이 암호화폐 산업의 제도권 편입을 인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3~4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는 정부의 입장에 투자자는 분통을 터트린다. 블록체인 관련 법안을 연구하는 한 변호사는 "지난 3년간 정부가 공부하지 않고 너무 안일하게 방임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며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발언은 3년 전보다 더 후퇴했고, 다른 국가의 정책과 규제보다 더더욱 뒤처진 상태가 됐다"고 꼬집었다.
'암호화폐 시장을 무조건적으로 막기보다는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여 신산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발언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다.
이 의원은 23일 페이스북을 통해 "암호화폐가 이미 세계 경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며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니다. 폐쇄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2018년 암호화폐를 투기·도박이라 여기고 거래사이트 폐쇄를 목표로 한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과 암호화폐를 인정하지 않고 손실 보호와 투자자 보호를 반대하는 은 금융위원장을 언급하며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우리 청년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암호화폐 시장을 산업으로 인정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며 "객관적 투자정보를 제공해 주고 투명한 시스템을 만들어 건전하게 투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가격조작·투자사기 등 불법행위 차단 △관련 제도 정비 △미래산업 측면 접근 등을 제안했다.
이 의원은 "암호화폐 시장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높여 투자자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신산업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암호화폐 시장을 두고 국무조정실, 금융위, 기재부, 한국은행과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범정부적 테이블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암호화폐 거래업계 "업권법 마련해달라" 한 목소리
다만 일각에선 암호화폐 거래 감독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다 보니 우리 정부가 먼저 방침을 정하기 어려울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이에 암호화폐 거래업계는 '사업자 규제'와 '산업 진흥'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는 해외 입법사례를 참고해 '가상자산업권법'이라도 만들어달라고 입을 모은다.
업권법은 특정 업종의 근거가 되는 법을 뜻한다. 업계는 P2P법처럼 암호화폐 시장만을 규정하는 업권법을 제정하거나, 결제 등 기존 유사한 기능을 지닌 관련 금융법 개정을 통해 암호화폐 사업을 정의해달라는 요청이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일 열린 '가상자산업권법 왜 필요한가' 온라인 세미나에서 "특금법은 자금세탁방지가 목적인 만큼 가상자산 산업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 가상자산업권법 제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진석 한국디지털에셋(KODA) 최고운영책임자(COO)도 같은 행사에서 "개정 특금법으로는 가상자산 산업 육성과 이용자 보호가 어려운 만큼 가상자산업권법 제정을 통해 건전한 사업자는 육성하고 그렇지 못한 곳은 도태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가상자산업권법이 다뤄야 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 국가의 경우 가상자산 사업자의 △고객자산 안전보관 의무 △보안 시스템 구축·관리 의무 △이의제기 절차·손해배상 제도 등 이용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법 제도에 두고 있다"며 "△가상자산사업자 내부통제 △이해상충 방지 △광고 규제 △자산의 분리보관 △자율규제 △보상보험 등 규제가 가상자산업권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