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뉴스] FTA개정·수입규제 '전방위 압박'

車·철강·농산물 '발등의 불'…대응 전략에 한계

2017-10-09     이정호 기자

[코리아포스트 한글판 이정호 기자] 미국발 '통상 쓰나미'가 우리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미치광이 전략'까지 거론하며 전방위로 강도 높게 통상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당당한 대응'을 외치던 우리 정부는 미국의 거친 태도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미국 요청에 따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절차에 들어가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미국 정부는 이와 함께 한국산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를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대상으로 지목했다.

사드 보복으로 중국 시장에서 홍역을 치른 국내 산업계로서는 미국 시장에서도 대형 악재를 만난 셈이다.

이처럼 미국의 압박이 높아지지만 우리 정부와 산업계는 이에 대응할 '묘수'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한미FTA 개정협상에 이어 '세탁기 세이프가드'까지

한국과 미국은 지난 4일(현지시간) 한미FTA 개정협상에 착수하기로 사실상 합의했다.

'당당한 대응', 'FTA 효과 분석부터'를 외치던 우리 정부가 개정협상 절차에 들어가기로 급선회한 것이다.

'한미FTA 폐기' 카드까지 거론하는 등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협상 전략이 한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실무진에 "그들(한국인들)에게 이 사람이 너무 미쳐서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뗄 수 있다고 말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합의로 한미 양국은 각각 국내법에 따라 협상 개시를 위한 국내 절차에 착수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5일(현지시간)에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수출한 세탁기로 인해 자국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판정했다.

지난달 22일 한국산 태양광 패널에 이은 두 번째 산업피해 판정이다.

ITC가 올해 말 트럼프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조치를 건의하면 이르면 내년 초 세이프가드 발동 여부가 정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조업 부활과 보호무역 기조를 일찌감치 천명한 만큼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연간 1조 원이 넘는 삼성과 LG 세탁기의 미국 수출이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초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 구제조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한국산 등 수입 철강제품에 8~30% 관세를 부과한 이후 16년 만에 세이프가드가 부활하는 것이다.

◇ 높아지는 전방위 압박

미국은 이 밖에도 산업 전 분야에 걸쳐 한국에 대한 각종 수입 규제 조치를 동원하고 있다.

ITC는 지난달 26일 한국 등 5개 국가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페트(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수지에 대한 반덤핑 조사 예비단계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세계 각국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새롭게 착수한 수입 규제 24건 가운데 미국이 8건으로 가장 많다.

그간 한국산 철강제품에 주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최근 화학, 섬유, 기계 등 여러 분야로 무역 장벽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6월 반덤핑 조사를 착수한 '원추(圓錐) 롤러 베어링', 저융점 폴리에스테르 단섬유, 합성 단섬유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무역확장법 232조'를 철강 수입에 적용할 수 있는지 조사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 있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정부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수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미국의 232조 조치가 이뤄지면 수일 내에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EU의 공언까지 나오면서 우리 철강업계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 국내 산업·농업계 '전전긍긍'

국내 산업계와 농업계에도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우선 한미FTA 개정협상과 관련해 자동차와 철강 업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두 업종은 그간 미국이 무역적자 주범으로 지목해 왔기 때문에 관세와 상계관세 부과 등으로 타격을 입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FTA 체결 이전으로의 교역 조건 복원은 국내 자동차 업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개정협상 시나리오다.

미국은 FTA에 따라 한국 자동차 관세(2.5%)를 2012년 협정 발효 후 2015년까지 4년간 유지하다가 2016년 폐지했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자동차는 무관세다. 일본·유럽산 자동차(2.5% 관세율)보다 관세 측면에서 이점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FTA 개정협상 과정에서 관세가 부활하면, 그만큼 미국 수출용 한국차의 가격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무관세 협정에 따라 한미FTA 발효 이전인 2004년부터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되고 있는 철강 분야는 전반적인 통상환경이 악화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한미FTA 개정협상을 계기로 미국이 한국산 철강에 대한 반덤핑·상계관세를 더 엄격하게 부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산 철강의 약 81%가 이미 반덤핑이나 상계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농업 분야도 개정협상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역전문지 '인사이드 US 트레이드'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8월 22일 한미FTA 공동위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한국의 미국산 농산물에 대한 관세 즉시 철폐를 요구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FTA 체결 당시 쌀을 비롯한 민감 품목 16개를 양허 대상에서 제외했다. 쇠고기는 협상 체결 당시 15년에 걸쳐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여부가 개정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경우 작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 공세에 밀리지만 대응 카드에는 '한계'

미국이 이처럼 통상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우리 정부와 산업계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북한 핵실험 등 동북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미국과의 협력이 필요한 우리 정부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이다.

한미FTA로 인한 갈등 때문에 한미 공조가 약해진다면 한국 정부에 상당히 부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FTA 개정협상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면 미국은 자동차와 농산물 시장 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한국이 적자를 보는 서비스교역 개선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서비스 무역흑자는 한미FTA 발효로 지식재산권, 법률, 금융, 여행 시장 등이 개방되면서 2011년 69억 달러에서 2016년 101억 달러로 증가했다.

미국이 최근 한국기업 등을 상대로 남발하는 반덤핑 관세와 세이프가드 조사 등 무역구제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으로 지적된다.

'투자자-국가소송제(ISD)'를 손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ISD는 우리나라 정부의 법·제도로 손해를 본 미국 투자자가 국제중재기구에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어 사법주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다만 이 같은 협상을 벌여 나가더라도 우리가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게 많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통상 전문가는 "미국은 이미 여러 분야의 시장을 많이 개방한 상태라 우리가 요구할 카드가 많지 않다"며 "양보한 만큼 얻어내면서 이익의 균형을 맞추는 게 협상인데 한미FTA 개정의 경우 우리가 얻을 이익이 미국보다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세탁기 세이프가드 조치와 관련해서는 오는 11일 산업부와 전자업계 관계자들이 대책회의를 열 계획이다.

이번 대책회의에서는 오는 19일 미국에서 열릴 구제조치 공청회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아울러 제소업체인 미국 월풀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국장급 주재 민관 회의가 미국이 밀어붙이는 거센 통상 압박을 막아내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 아니냐는 회의적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