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아일랜드 대사관·IAK 주최, 한국전 기념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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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아일랜드 대사관·IAK 주최, 한국전 기념 행사
  • 이경식 선임기자
  • 승인 2016.11.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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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 얼스터 보병연대(The Royal Ulster Rifles) 장병들 혁혁한 전공 세워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선임기자] 주한 아일랜드 대사관과 한국아일랜드협회(IAK)가 지난 11월 12일 서울 이태원 해밀톤 호텔에서 공동 주최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번 모임은 1950년 한국전 당시 아일랜드 로열얼스터라이플즈 연대가 영국제1연방사단 제 29여단에 소속되어 한국전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였다.

▲ 전적지 방문 출발에 앞서 당일 행사를 설명하는 앤드류킬브라이드한국아일랜드협회 회장 (우측 걸개 그림 제거 점선 끝 부터)

이 행사 개막식에서 앤드류 킬브라이드 아일랜드협회회장이 소개사를 했고 데이비드 머피 주한아일랜드 부대사의 연설도 있었다.

또한 이날의 핵심인물인 역사 한국전쟁을 소재로 여러 권의 중요한 책과 글을 쓴 한국통 영국언론인 앤드루 새먼(Andrew Salmon)도 행사에 참석했다.

당일 방문한 격전 유적지인 ‘해피발리’ 계곡은 경기도 양주시장흥면삼하리에 위치해 있다.

▲ 데이비드머피주한아일랜드부대사가 그날의 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날 행사에는 약 60~70명의 한국 거주 아일랜드 사람들과 내국인이 참석을 하였는데, 이중에는 코리아포스트의 이경식 발행인 겸 회장, 삼성화재 전병근 영어팀장, 조인숙 유니아 건설인 국제담당 대표, 니콜하우즈 신정수 대표 등도 참석했다.

한국아일랜드협회는 한국에서 아일랜드 문화를 소개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이다. 한국 내 아이리쉬 커뮤니티에게는 고국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 문화와 전통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행사들을 기획하고 있다.

▲ 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 마이크 머독 영국군 대령(현 유엔군 사령부소속), 배경설명을 한 버나드휴씨, 이경식 코리아포스트 발행인 겸 회장 그리고 영국인 소설가 앤드루쌔먼씨

이 협회는 1990년대 초반에 생겨나 지금까지 아일랜드와 그 문화를 알리는데 노력해왔다고 킬브라이드는 이 날 설명했다.

이 협회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아일랜드 군인과 그 후손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에 힘써왔기에 이 날 스케줄에는 녹사평 전쟁기념관과 해피벨리 투어도 했다.

해피밸리 전투 내용:

1 4 후퇴(1951년 1월 4일)는 한국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1월 4일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서울에 도달하기 전에 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을 떠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2주가 넘도록 서울을 방어하면서 시민들의 피난을 지원했다. 서울 북방에 위치한 해피밸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The Royal Ulster Rifles)는 1951년 1월 3일 저녁부터 4일 새벽까지 왕립 아일랜드 경기병연대(The King's Royal Irish Hussars)와 왕립 포병연대(The Royal Artillery) 등 두 영국군 연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한국전쟁을 소재로 여러 권의 중요한 책과 글을 쓴 한국 통 영국언론인 앤드루 쌔먼(좌로부터 세 번째)이 격전지설명판 앞에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왕립얼스터 보병연대와 왕립 아일랜드 경기병연대는 비록 영국군에 속해 있었지만 아일랜드 전역에서 온 많은 장병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많은 아일랜드 지원병들이 유엔의 기치 하에 한국전에 참전했다. 해피밸리는 한국의 자유 수호라는 대의를 위해 싸운 아일랜드계 병사들의 희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적지이다.

1951년 7월 해피밸리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한국산 화강암으로 만든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전사자에게 바쳐진 이 추모비에는 '누가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추모비는 1962년 북아일랜드로 옮겨졌고 지금은 벨파스트 시청 앞에 세워져 있다.

전투 개요: 1951년 1월 1일 23만 7천명의 북한군과 중공군은 서울을 목표로 한 공격을 시작했다. 임진강에서 유엔군 전선이 붕괴되면서 서울 서북방 12마일 전선 방어를 위해 영국 제29 보병여단이 긴급 투입되었다.

▲ 기념비에 헌화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 영국군 대표 마이크 머독 대령

여단의 책임지역에 위치한 2개의 계곡은 왕립 노섬벌랜드퓨질리어 연대(Royal Northumberland Fusiliers) 제1대대와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 제1대대가 기갑부대와 포병부대의 지원을 받아 방어하고 있었다. 1월 3일 새벽 중공군 2개 사단이 공격을 감행 했으며 치열한 전투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땅거미가 질 무렵 퓨질리어 연대 제1대대는 전체 유엔군의 철수에 따른 철수 명령을 하달받았으며 그들은 적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바로 이곳 해피밸리-해피라는 지명은 우울한 역설적 표현이다-에서는 1월 3일 저녁부터 4일 새벽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 극단적 전투 상황들이 이어졌다. 제8 왕립 아일랜드 경기병연대 전차부대와 왕립 포병 연대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하루 종일 막아낸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는 철수 명령을 하달 받았다.

적과 마주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야간 철수는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하던 철수 대열이 노출되고 말았다. 중공군은 언덕 위에서 총을 발사하면서 계곡 아래로 밀고 내려왔다. 치열한 근거리 전투가 이어졌고 군인들과 전차들은 솟아오르는 불길 속에서 전투를 벌였다.

왕립 얼스터 보병연대 소속 157명의 장병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중공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왕립 경기병연대의 전차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왕립 얼스터 연대 제1대 대장과 왕립 경기병연대의 기병 중대장이 교전 중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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