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세계축제올림픽 피나클 어워드 축제에 주한 외교 사절 참석 대성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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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세계축제올림픽 피나클 어워드 축제에 주한 외교 사절 참석 대성황
  • 김수아 기자
  • 승인 2017.10.05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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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희 구청장 주한외교 사절 초청

[코리아포스트 김수아 기자] “올해로 17회 째를 맞는 한성백제문화제는  2천 년 전 이곳 송파에서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 피웠던 한성백제를 재현한 역사문화축제입니다.”

이 말은 지난 9월 24일 한성백제문화제 참석을 위해 송파구를 방문한 30명의 주한외교 사절을  위한 올림픽 파크텔에서 있은 만찬장에서 한 박춘희 송파 구청장의 인사말이다.

▲ 박춘희 송파구청장(앞줄 왼쪽부터 8번째)이 송파구 한성백제 문화제 주한 외교사절단 환영식에서 주한 대사 및 외교관들과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한 루마니아 미하이 씨옴펙 대사(박춘희 송파구청장의 우측) 그리고 앞줄 왼쪽부터 네번째는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발행인

그는 이어, “한성백제문화제는 4년 연속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유망축제로 지정되었고, 5년 연속으로 세계 축제의 올림픽인 피나클 어워드를 수상한 우리 송파구의 자랑스러운 축제입니다.”라고 말해 대한민국의 대표축제로 자리메김 하였음을 알렸다. (기사 말미 구청장 환영사 참조).

이날 리셉션에는 주한 외교사절단에서는 미하이 치옴팍 주한 루마니아 대사, 에디 카서바 주한 헝가리 대사부인, 서라 뎃 오 명 주한 미얀마 대사부부, 리나 오쿠무라 바이바르스 주한 라트비아 대사부인, 유서프 샤리프 조다 타지키스탄 대사부부, 나다브 펠트맨 주한 이스라엘 대리대사 부부, 아페프 포카리 아델바리 주한 튀니지 대리대사 부부, 다이오메드 칼레스 주한 파나마 대리대사 부부, 주한 불가리아 판코 파노브 부대사 부부 등이 대사를 대신해서 참석을 하였다.

▲ 송파구 한성 백제문화제 주한 외교사절단 환영식에서 박춘희 송파구청장에게 주한 루마니아 미하이 씨옴펙 대사가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박춘희 구청장의 환영사에 이어 이날 주한외교사절방문단을 대표하여, 미하이 치옴팍 루마니아 대사는 이날 각국대사 부부를 초청해준 박춘희 구청장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서울에서는 드물게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축제를 통해 직접 접하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라고 전제한 다음, “이 기회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어, 안성화 송파구 의회 의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안의장은, “2,000년전 한성백제시대의 가을하늘은 오늘 밤과 같이, 별이 반짝이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몽촌 토성의 밤이었을 것 이며, 당시의 온조왕을 비롯한, 모든 왕들 또한, 이곳에서 외국 사신들을 모시고 풍류를 즐기면서 상호 문화를 교류하였을 것 입니다.”라고 그 옛날의 백제문화를 소개 하였다.” (별기 연설문 참조)

▲ 무령왕릉 석수를 표한한 퍼레이드카

이어 서울상공회의소 송파구상공회 석수경 회장이 수치를 송파구재 4만여 상공인의 역할을 소개 했다. 그는,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만에 이룩한 경제발전은 경이롭습니다.”라고 전제한 다음, “국내총생산은 1조 4천억 달러로 천배 넘게 성장하여 세계 10위권이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라고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잘 실태를 알렸다. 그는 이어, “그 중에서도 송파구는 살기 좋은 행복도시로서 4만여 사업체가 상주하여 지역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나가고 있고, 국내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고자 하는 우수한 중소기업들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송파구 올림픽 평화의 문 광장 앞에서 백제시대 전통의상을 착으한 각국의 주한 외교사절단이 이날 한성백제문화제를 빛내어주기 위해 참석하였다.

뒤 이어, 문성호 취진위원장 건배사가 있었고, 김원섭 문화원장의 동 축제와 더불어 구내 문화 유산과 활동 사항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만찬이 있기 전, 주한외교사절 송파 방문단은 올림픽 평화의 문 광장에 차려진 축제 체험장을 반문해 백제시대의 문화와 생활양식 그리고 활쏘기와 죄수 고문틀 체험 등 여러 가지 백제인들의 풍습을 체험을 통해 경험해 보았다.

그러나 이날 행사의 대미는 약 1시간에 걸쳐 펼쳐진 역대 백제 왕들과 지배층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소개하는 긴 프로세션 행렬 이어 졌다.

2천년 백제의 모든 왕과 왕비 그리고 장수와 무사에 이어 각종 백제 문화의 백미가 소개되어, 많은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 한성백제문화제 전통체험마을에 방문한 주한 대사 및 외교사절단

이어 각국 대사들은 축제장으로 안내되어 패막식 행사에 참석을 하였으며, 이곳에서 펼쳐진 각종 공연행사에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이날 공연에는 박구윤, 서영은 그리고 ‘장미여관’ 보컬그룹아 열연을 하였으며, 이들의 의 다이나믹하고 바이브런트한 리듬에 참석한 주한외교사절, 특히 젊은 부인들과 자녀들은 완전히 동화 현상을 보였다.

끝으로 이날 행사의 진짜 대미를 장식한 것은 패회식 직전의 불꽃놀이 였다. 백제 한성벌 밤하늘을 완전히 수놓은 불꽃놀이는 식장 광장을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메운 2만여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놓았다

박춘희 구청장 환영사 요지:
한성백제문화제를 축하하기 위해 우리 송파구를 방문해주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 드립니다.
올해로 17회 째를 맞는 한성백제문화제는 2천 년 전 이곳 송파에서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 피웠던 한성백제를 재현한 역사문화축제입니다.
또한 4년 연속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유망축제로 지정되었고, 5년 연속으로 세계 축제의 올림픽인 피나클 어워드를 수상한 우리 송파구의 자랑스러운 축제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구는 한성백제의 문화유산, 아름다운 자연환경, 그리고 대한민국의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가 공존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 도시로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 송파를 찾아주신 대사님들을 비롯한 외교사절단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우리 송파구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세계를 리드하는 도시로 함께 발전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 롯데타워의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주한 외교사절단, 최고 높이 123층을 자랑하는 엘리베이터는 117층까지 도달하는데 1분이 걸리지 않으며, 실제로 53초 정도 걸렸다고 코리아포스트 김형대 사장이 전했다.

안성화 의회의장 환영사 요지:
존경하는 외교사절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송파구 의회의장 안성화 인사 드립니다.
2,000년전 한성백제시대의 가을하늘은 오늘 밤과 같이, 별이 반짝이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몽촌토성의밤 이었을 것 이며, 당시의 온조왕을 비롯한, 모든 왕들 또한, 이곳에서 외국 사신들을 모시고 풍류를 즐기면서 상호 문화를 교류하였을 것 입니다.
이번 축제를 빛내주시기 위해, 먼 길 마다 않고 백제의 옛 도읍지인 우리 송파구를 찾아주신 각 국 대사님들과 내•외 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송파구의회의 의장인 저를 비롯한 의원 26명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대한민국 대표행복도시 송파구의 발전을 위하여 박춘희 송파구청장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송파구 박춘희 구청장(앞줄 왼쪽에서 11번째)이 한성백제문화제 거리행렬을 관람중이다. 두번째줄 부터 주한외교사절단이 관람석을 채워 문화제의 의미를 더 했다

존경하는 외교사절단 여러분!
현재의 우리나라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매우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문호 어네스트 헤밍웨이는“비록 지금 늦은 밤까지 암울하고 침통하지만 내일은 다시 밝은 태양이 여지없이 떠오른다!”고 저술하였듯이 우리 대한민국은 “위기를 곧 기회로 만드는 위대한 민족”이기에 지혜를 모아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룰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번 축제를 빛내주신 각 국 대사님과 내•외 귀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즐거운 한성백제 시대의 밤이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 왼쪽부터: 리나 오쿠무라 바이바르스(주한 라트비아대사부인), 롯데타워 박동기 사장, 주한 미얀마 뚜라 펫 우 마웅 대사 부부와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발행인

송파구상공회 석수경 회장 축사 요지:
존경하는 박춘희 구청장님, 송파구 문화축제를 빛내주시기 위해 참석해주신 각 국의 대사와 가족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2000년 전 한성백제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송파구의 문화축제에서 외교사절단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니 더욱 의미 있고 반가운 마음입니다.
저는 서울상공회의소 송파구상공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석수경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저를 포함하여 송파구에서 지역경제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송파구상공회의 경제인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만에 이룩한 경제발전은 경이롭습니다. 국내총생산은 1조 4천억 달러로 천 배 넘게 성장하여 세계 10위권이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송파구는 살기 좋은 행복도시로서 4만여 사업체가 상주하여 지역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나가고 있고, 국내를 넘어 해외로 진출하고자 하는 우수한 중소기업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함께 해주신 각 국의 대사 여러분께서 송파구에 애정을 가져주시고, 해외로 진출하고자 하는 송파구의 우수한 기업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셔서 해당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우호증진을 도모해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거리행렬을 가득 메운 다양한 볼거리와 마스코트들

김원섭 문화원장 축사 요지:
2017 한성백제문화제 외교사절단 폐막식 건배 사(저녁)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시고 2017 한성백제문화제 행사를 빛내주시기 위해 참석해주신 각국 대사님들과 국내외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4일간 개최한 한성백제문화제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제가 건배를 제의하겠습니다.
자! 그럼 잔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건배 사는 “찬란한 한성백제여, 영원 하라.”로 하겠습니다.
“찬란한 한성백제여 영원 하라!!!”

김원섭 문화원장 축사 요지:
우리나라 국목은 지정된 바는 없지만 상징적으로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소나무 삼행시로 건배제의 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함께 운을 띄워주면 시작하겠습니다. [소!] 소중한 우리문화재의 [나!] 나눔을 위한 이 축제의 장에서 [무!]한한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다 함께 '소나무'라 외치며 건배합시다!

▲ 주한 파나마 대사 가족이 백제시대의 전통 무기인 방패와 창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송파구의 역사적 배경: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백제 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유역의 위례지역으로 이동해 와서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기원 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31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한강(현 서울)의 중하류에 위치한 소국이었지만, 점차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하였다. 한강 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을 삼은 백제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 웅진(현 공주)과 사비(현 부여)로 두 번이나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다.
기원 전 18년부터 기원 후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였던 서울을 빼앗겨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를 한성시대라고 부른다. 475년부터 공주에 도읍을 정했던 시기를 웅진시대라 부르며, 이후 538년에 성왕이 다시 도읍을 사비로 옮긴 이후부터는 사비시대라고 한다.
웅진시대와 사비시대를 거치면서 백제는 바다 건너 외국들과도 적극적인 외교 관계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우수한 문화를 꽃피워 선진문화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660년 신라와 당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이어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백제는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국가의 운명을 다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함께 한국의 고대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의 한 국가로서 문화교류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백제는 선진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다시 발전시킴으로써 수준 높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들 문화를 주변국들에게 전파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풍부한 문화는 백제의 고토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결과 백제의 왕도가 있었던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고 있다.

▲ 전통체험마을에서 주한 미얀마 뚜라 뗏 우 마웅 대사(왼쪽)와 주한 타지키스탄 대사 자녀가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발행인에게 주리틀기 고문을 시연하고 있다.

백제는 부여계통의 여러 이주민 세력이 한강유역의 선주민과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이다. 백제가 건국되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이미 마한이라는 나라 안에 여러 소국들이 있었다. 백제는 이러한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성장•발전하였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기원 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한강 주변에 위례성이라는 성과 궁궐을 짓고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형인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온조에게 통합되고, 나라의 이름도 ‘모든 백성이 즐겨 따랐다’라는 뜻으로 백제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제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연맹왕국으로 성장한 시기는 제8대 왕이었던 고이왕대(재위 234~286)부터였다. 고이왕은 246년 낙랑의 변방지역을 공격하는 등 중국의 군현세력과 대립하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서서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관직의 등급을 매기고(16관등 제도) 등급에 따라 옷의 색깔을 정하였다. 또한 261년에 행정기구인 6좌평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발전된 통치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왕성을 축조하여 방비체제를 구축하였다.
백제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대였다. 근초고왕은 전라도 지역의 마한세력을 통합시키고, 가야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면서 점차 영역을 남쪽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저지하면서 371년에는 친히 정병 3만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 결과 근초고왕 때는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포함해 황해도 일부지역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근초고왕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근초고왕은 대외교류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중국 동진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에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며 말을 선물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학자와 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학문과 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람들 가운데는 박사라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백제는 일찍부터 학문과 기술 등 여러 분야에 박사제도를 두어 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주고 벼슬도 내렸다.
한편 백제는 4세기 후반부터 약 100여 년간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제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은 왕족중심의 지배체제와 대규모 토목공사 등을 진행하면서 전제왕권을 추구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 북위와의 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정책은 내부적인 분열과 함께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남침을 초래하였다.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은 장수왕이 이끈 고구려군에게 7일만에 함락되고, 개로왕은 붙잡혀 살해당하였다. 이때 왕을 비롯해 태후•왕자 등이 몰살되었으며, 8천 명의 남녀가 포로가 되었다.

▲ 전통체험마을에서 활쏘기 체험을 시연중인 주한 외교사절단

백제의경제제도: 백제는 철제의 농기구•토목용구(土木用具)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토지지배의 유형에서 상부 특권층의 토지지배에는 국가•왕실의 직속지, 귀족들에 대한 사전(賜田), 사원전(寺院田) 등이 있었다. 또 대귀족에 대한 식읍(食邑)의 사여(賜與)도 있었다. 전렵지인 서해대도(西海大島)•횡악(橫岳) 등은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이다.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외에 특별한 공로로 전조권(田租權)이나 식읍을 부여받기도 했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의 토지지배로는 농민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 소를 사용한 경작[우경(牛耕)]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에 농업경영 방식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집체적 방식에서 소농(小農) 중심의 농업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소유가 촉진되고,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 경작지는 국가의 각종 수탈과 귀족층의 강점(强占) 대상이 되었다. 또 빈번한 전쟁에의 동원 등으로 농토를 상실한 농민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남의 농토를 용작(傭作)하기도 하였다. 토지경작은 소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한 자유농민에 의해 주로 이뤄졌으며 노예노동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지배는 생산력의 향상과 연관된다. 백제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의 사용을 장려하고 또 우경을 행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리관개시설(水利灌漑施設)을 정비하였다. 수리시설은 안동 저전리에서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굴된 것에서 보듯이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졌다. 따라서『삼국사기』초기기록에 보이는 수리시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 제방이라 할 수 잇다. 백제에서 본격적으로 저수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벽골제는 나뭇가지 등을 이용한 부수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무령왕은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전국의 제방을 수리하고 새롭게 축조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저수지의 축조는 많은 논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기(渴水期)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어서 획기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조세제도: 백제의 세제(稅制)는 조(租)•조(調)•역역제(力役制)로 이루어졌다. 조(租)는 농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조(調)는 가내 수공업의 생산물이나 각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역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조(租)와 조(調)는 결합된 형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조조(租調)의 수취물로는 포(布)•견(絹)•사(絲)•마(麻)•미(米) 등이었고, 매년 풍흉(豊凶)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수취하였다. 역역은 국가나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役)과 군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역역 징발대상은 주로 하호로 표현되는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정(丁)을 부 단위로 징발되어 축성(築城)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되었다.
조의 수취대상은 농민이었다. 백제 초기의 농민은 하호(下戶)로 불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국가통치체제가 갖추어지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변화되었다. 이에 민은 소국 수장들의 사적 수탈에서 벗어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민적 존재로 편입되었다. 국가는 민호(民戶)를 파악하고 이렇게 파악된 호구를 토대로 편호제(編戶制)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반포되었을 율령에는 호구령(戶口令)과 부역령(賦役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도읍기에 역역징발 업무를 맡은 관청은 사공부(司空部)였다.
수공업•상업: 백제의 수공업은 마한 시기 수공업의 기술과 생산 분야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수공업 가운데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직물 생산이다. 포의 종류에는 세포(細布)와 추포(?布)가 있었다. 백제는 오색채견(五色彩絹)을 왜에 보냈고 또 봉제기술자인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보냈으며 관리들은 자(紫)•비(緋)•청(靑)색의 공복을 입었다. 이는 백제의 직조(織造) 및 염색술의 발달을 보여준다. 직기(織機)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비경이[베틀에 딸린 제구의 하나]를 통해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철 수공업의 경우 충청북도 진천 석장리에서 초강이 만들어진 제철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백번 단련한 철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금상감으로 글자를 새겼다. 이는 백제의 뛰어난 제련기술과 상감기술을 잘 보여준다.『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철정(鐵鋌) 40매와 단야(鍛冶) 기술자를 파견한 기사가 나온다. 한편 불교 전래 후 사원•불상•불화 등 우수한 불교예술품이 제작되었다. 또 도공품(陶工品)으로는 정교한 문양전(文樣塼)과 기와•질그릇 등이 제작되었다.
수공업 제품은 왕실이나 관청 소속의 장인(匠人)이나 노비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들은 국왕과 왕실의 생활용품은 물론 지배자의 권위를 표현하는 각종 위세품(威勢品)과 대외 교역에 수반되는 증여품을 제작하였고 또 무기와 갑옷 등 군사용품도 생산하였다. 일반민이 사용하는 토기•농기구와 각종 도구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기술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와박사, 노반박사 등과 같은 박사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박사 칭호 소지자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미숙련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삼베 같은 일상적인 의류 소재나 목기, 짚신 등은 대부분 일반민들이 가내에서 생산하였다. 수공업과 관련한 기구들은 내관 22부 가운데 육부(肉部)•마부(馬部)•도부(刀部)•목부(木部) 등이다.
생산력이 발전하여 잉여생산물이 늘어나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상업이 발전하였다. 또 도시의 발달은 물자 유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였고 그 가운데 수도는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수도 안에 상설시장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관시(官市)이다. 그리고 원활한 물자 공급을 위해 도로 교통망이 정비되었다. 왕도에서의 상업은 도시부(都市部)가 관리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향시(鄕市)가 있었다. 일정한 기간마다 열리는 이 향시에는 행상(行商)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지방과 지방 사이에 물자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제의 대외교역은 중국대륙과의 교역, 일본열도와의 교역으로 나누어진다. 중국과의 교역은 서진 및 동진대의 청자나 전문도기가 백제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대외교역의 활성화는 4세기 초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어 중국 군현 중심의 교역체계가 붕괴되자 백제가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왜와의 교역은 366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왜는 백제로부터 유학이나 불교 등 정신문화를 비롯하여 직조기술 등 기술문명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교역항으로는 한성도읍기에는 한강 하구에 위치한 인천이, 사비도읍기에는 수도 웅진성이나 사비성의 관문인 금강 하구가 중심을 이루어졌다. 이외의 교역항으로는 당진 지역, 죽막동 유적이 발굴된 부안 지역, 연산강 유역의 나주와 영암 지역, 섬진강 하구의 하동 지역이 있었다. 대외교역에서는 항해의 안전이 급선무이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초월자에게 드리는 제의가 행해졌다. 태안의 백화산에 세워진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과 무속적(巫俗的) 신에 의존하여 제의를 드린 부안죽막동유적(扶安竹幕洞遺蹟)이 그 좋은 예가 된다.
백제의 대표적인 대외교역품으로서 견직물로는 오색채견•백금(白金)•세포 등이, 철소재로는 철정이, 무기•무구류로는 각궁전(角弓箭)•명광개(明光鎧)•철갑조부(鐵甲彫斧) 등이, 칠제품으로는 황칠수(黃漆樹) 등이 있다. 백제가 중국의 여러 왕조로부터 수입한 물품으로는 역림•식점 등 서적와 요노 등 무기 및 약재, 글씨, 열반경(涅槃經) 등 정신문화적인 것과 도자기나 거울 등 고급 공예품 등이었다. 한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인 스에끼라든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데 사용한 금송(金松) 등은 왜로부터 수입한 것이다.
문화적 환경: 유학은 유가(儒家)의 학문이란 뜻이며, 유교는 유가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초기 백제는 낙랑군을 통해 유학이 전래되었고 비류왕대에 와서 유학을 국가통치 상에서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근초고왕대에는 박사제도(博士制度)를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고 보급하였다. 웅진•사비도읍기에 오면 무령왕은 오경박사를 설치하였고 성왕 때는 양(梁)나라에 모시박사•강례박사를 초빙해왔다. 이리하여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은 훨씬 높아졌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삼년상을 치룬 것이라든가 이름에 유교 이념을 잘 보여주는 충•신•의•효 등을 사용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유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은『서기』를 편찬하였고, 위덕왕대에 와서는『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백제본기』등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가 편찬되었다.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인 근초고왕은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천자문』과『논어』를 전수하였고,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조묘(始祖廟), 종묘(宗廟), 사직(社稷), 교사(郊社), 산천제의(山川祭儀) 등 유교적 의례제도도 정비되었다. 시조묘는 건국주인 온조왕이 부여족의 족조인 동명(東明)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시조묘에 건국주가 아니라 부여족의 족조(族祖)를 모신 것은 백제의 특징이다. 종묘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모신 사당이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적 제의체계의 중심이이서 왕조를 창건하면 반드시 왕도에 설치하였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여자형의 대형건물지는 종묘일 가능성이 크다. 교사는 교외에서 지내는 천지신에 대한 유교적 제의이다. 교사 때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단을 대단 또는 남단이라 하였다. 왕이 즉위하면 교사에서 즉위의례를 하였다. 교사에 드리는 희생제물은 소•돼지•사슴 등이었다. 산천제의는 종래의 산악숭배 신앙을 유교적 예제(禮制)에 따라 재정비한 것이다. 백제는 왕도와 전국의 산천 가운데 중요한 산천을 제사의 대상으로 하면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어 그 등급을 매겼다. 대사에 속한 산은 삼산(三山)인데 사비도읍기의 삼산은 일산(日山: 금성산), 오산(吳山: 오석산), 부산(浮山)이었다. 오악(五嶽)의 위치는 동악(東嶽)은 계람산(鷄藍山: 계룡산), 남악(南嶽)은 무오산(霧五山: 지리산), 서악(西嶽)은 단나산(旦那山: 월출산), 북악(北嶽)은 보령의 오서산이었고, 중악(中嶽)은 산 이름을 알 수 없는데 고부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 이 오악은 나라의 각 방위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불교: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1)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아신왕은 불법을 숭신(崇信)해 복(福)을 구하라는 하교(下敎)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蓮花文 瓦當)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에 무령왕은 교단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겸익을 인도에 보내 계율을 배워오게 하였다. 겸익이 인도에서 돌아오자 성왕은 겸익이 갖고 온 범문율부(梵文律部)를 명승(名僧) 18명으로 번역하게 하고,『율소(律疏)』36권을 저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역행(力行)을 강조하였다. 웅진도읍기의 사찰로는 대통사지가 유명하다.
백제의 불교는 사비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성왕은 사비도성을 조성하면서 시가지의 중심에 정림사(定林寺)를 창건하였고, 양나라로부터 열반(涅槃) 등 경의(經義)와 공장(工匠)•화사(?師) 등을 청해왔다. 법왕은 호국의 영장(靈場)으로 왕흥사를 세워 왕권강화를 추구하였고, 무왕은 익산에다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여 미륵의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이루려고 하였다. 근래에 발굴된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은 정치적으로는 폐하, 즉 황제로 불렸음이 밝혀졌다. 불상으로는 예산사면석불(禮山四面石佛),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등이 유명하다.

▲ 주한 모로코대사가 떡메치기 체험을 시연중에 있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교리 연구도 활발해 율학(律學)이 발달하고 삼론학(三論學)•성실종(成實宗) 등이 연구되었다. 이름난 승려로는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 삼론학의 대가로 일본에서 초대 승정(僧正)이 된 관륵(觀勒),『법화경(法華經)』의 독송(讀誦)에 힘써『속고승전(續高僧傳)』에 오른 혜현(慧顯), 중국의 형산(衡山)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운 현광(玄光), 일본에 건너가『성실론소(成實論疏)』를 저술한 도장(道藏) 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백제성왕은 왜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법륭사 5층목탑(法隆寺五層木塔)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창건 등은 모두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관륵은 왜에 천문•둔갑(遁甲)•방술(方術)의 서적을 전수해주었고, 초대 승정이 되어 왜의 불교교단을 정비하였다.
도가사상: 도교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의 사회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던 격동의 시기에 성립되었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도교의 사상적 토대이자 도교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초기백제는 서진과의 교섭을 통해 도교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시기는 황룡(黃龍)의 출현과 왕의 복색을 오행의 색깔로 한 것에서 볼 때 고이왕대로 볼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는 장군인 막고해(莫古解)가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 이미 4세기 중엽에『도덕경』이 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사왕은 도교적인 원지(園池) 사상에 따라 못을 만들어 이훼(異卉)와 기금(奇禽)을 길렀다.
웅진도읍기에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와 묘지석(墓誌石)이다. 진묘수는 죽은 자를 보호하는 기능 이외에 사자(死者)의 영혼을 승선시키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묘지석에는 왕의 무덤이 위치한 곳은 지하세계의 신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등으로부터 산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또한 도가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도가사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성행하였다. 무왕은 궁남지를 축조하고, 못 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를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기었다. 또 와전(瓦?)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이 제작되고, 능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졌다. 또 관륵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 중에 둔갑•방술 같은 도교적인 잡술(雜術)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 주한 헝가리 대사부인이 고문체험을 시연하고 있다

신앙과 의례: 백제의 토속신앙(土俗信仰)으로는 소도신앙(蘇塗信仰), 농경 의례, 점복(占卜), 은(殷) 조상숭배, 제천신앙, 산천신앙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한 오제숭배(五帝崇拜) 외에는 토속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왔다.
소도는 마한을 구성한 각 소국에 두어진 별읍(別邑)을 말한다. 이 별읍은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이곳에 도망해온 자에 대해서는 사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소도는 백제가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하면서 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면서 별읍으로부터 지방행정조직의 하부 단위로 전환되었다.
농경의례와 관련하여서는 파종제(播種祭)와 추수제(秋收祭: 수확제)가 있다. 파종제는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추수제는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수확을 한 후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제의를 거행하는 때에는 수십 명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셨으므로 집단제의(集團祭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는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유교적 제의체계로 전환되었다. 토지신인 ‘사(社)’와 곡신인 ‘직(稷)’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워 국가의 안위로 풍요를 기원한 것이 그것이다.
점복은 별자리와 달의 천체 현상, 동물의 희생 또는 골각기(骨角器)로 점을 쳐서 길흉을 살펴보는 것이다. 점복은 개인적인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행해졌다. 점을 칠 때 사용한 뼈를 복골(卜骨)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역림과 식점을 새로이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점을 치는 방법도 종래의 복골이 아니라 식반을 이용하여 점을 치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용신앙(龍信仰)도 행해졌다. 용은 수신(水神)의 상징이다. 용신앙은 용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풍농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또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생각하고 용왕에게 풍어제(豊漁祭)를 지내고 또 항해에서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용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백제에서는 남근숭배신앙(男根崇拜信仰)도 행해졌다. 남근은 악귀를 내쫓기도 하고 신에게 봉헌(奉獻)하는 봉헌물이기도 하였다. 남근숭배신앙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을 보여준다. 능산리폐사지(陵山里廢寺址)에서 발굴된 목간 가운데 발기된 남근에 각서와 묵서(墨書)가 있는 목간은 교차로 설치하여 마을의 수호와 자손 번영, 교통안전을 지켜주는 것으로 관념화 되었다.
백제에서는 산천에 신이 있어 마을을 지켜주고 나라를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한시기에는 각 국보다 자신의 영역 범위 내의 산천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산천제의가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국도에 있던 산천은 그 격이 격상되어 대사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방에 위치한 산천은 일부만 오악에 편제되었고 그렇지 못한 산천은 제외되었다.
상례와 무덤: 왕이 죽으면 무덤에 묻히게 된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기까지 진행되는 의식과 예절이 상례(喪禮)이다.「무령왕릉묘지석」에 의하면, 왕이 죽자 27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두었다. 이 기간을 거상(居喪)이라 하는데 3년 상이었다. 3년 동안 시신을 빈전에 두었다는 것은 백제 상례의 특징이다. 기와 건물지와 벽주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얼음을 저장한 시설도 발견된 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은 바로 빈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발행인이 이날 참석한 주한외교단을 직접 소개하고 있다

시신을 묻을 곳을 정한 후 돈으로 지하 신들에게 장지(葬地)를 사서 세상의 법률에 얽매이지 않도록 계약한 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매장하였다. 죽어서 마지막 무덤에 묻기까지 상주(喪主)들은 상복을 입었다. 상복 기간은 망자(亡者)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부모와 남편이 죽었을 경우 자식이나 부인은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나머지 친척들은 장례와 동시에 상복을 벗었다.
시신을 묻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백제의 무덤은 크게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封土墳)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토광묘(土壙墓: 움무덤)•옹관묘(甕棺墓: 독무덤)로 구분된다. 적석총은 서울 석촌동이나 양평 문호리, 연천 삼곶리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적석총들은 만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과 맥을 같이 한다. 석촌동 제3호분은 동서 55.5m, 남북 43.7m의 평면에 현재의 높이가 4.5m인 대형 적석총으로서 3단까지 추적할 수 있다.
웅진도읍기로 오게 되면 적석총은 없어지고, ‘ㄱ자형’ 석실분과 장방형 석실분이 유행하고 중국계통의 전축분(塼築墳)이 축조되었다. ‘ㄱ자형’ 석실분은 돔(Dome)형식에 벽에 회칠을 했으며, 장방형 석실분은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축분으로는 사신도가 그려진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무령왕릉은 터널형 전축분으로 연도가 달려 있다.
사비시대로 오게 되면 ‘ㄱ자형’ 석실은 없어지고 연도가 달린 상자형 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 무덤은 능산리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7기가 남아 있다. 중하총(中下塚)은 석제로 터널형의 석실을 만들었는데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하총(東下塚)은 네 벽 및 천장을 잘 물갈이한 편마암 판으로 축조했고, 석면(石面)에 사신과 연화문을 직접 그렸다.
영산강 하류인 나주시와 영암군 내에서는 대형 옹관묘의 군집이 있다. 이 옹관묘들은 초기철기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 봉토 내에 여러 개를 합장(合葬)한 것이 주류이다. 옹관의 형식에는 단옹(單甕)과 합구식(合口式)이 있다. 이 가운데 나주 신촌리 제6호분은 금동관•금동식리(金銅飾履)•철도(鐵刀) 등의 부장품이 나와 이 지방의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이 지역의 특징적인 무덤양식으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백제 귀족설, 왜계 백제관료설 등이 있다.

▲ 주한 이스라엘 대리대사 부부와 주한 라트비아 대사 부인

토목과 건축: 백제의 토목 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곽(城郭), 고분, 제방 등 대규모 토목물이다. 성은 축조 재료에 따라 목책(木柵), 토축성(土築城), 석축성(石築城)으로 나뉜다. 이러한 성 가운데 축조 모습을 생생이 보여주는 것이 왕성인 풍납토성이다. 축조공정을 보면 생토 모래층 위에 형성된 점토층(粘土層)을 기저부로 삼아 전체적으로 정지작업을 한후 그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 올리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내•외면에서 비스듬하게 점질토(粘質土)와 사질토(沙質土)를 교대로 쌓아올렸다. 최하층에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고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깔았다. 이를 부엽공법(敷葉工法)이라 하는데 성벽의 안전성과 토층 사이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풍납토성 축조에 사용된 부엽공법은 이후 토성•제방 축조에 사용되었다. 사비도읍기에 만들어진 나성도 동쪽 부분은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의 제방도 발굴 결과,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건축물로는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사서에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 이 가운데 건물지가 확인된 것으로는 한성도읍기의 경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종묘로 보이는 제의 건물지,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임류각지(臨流閣址)와 왕궁지(王宮址), 사비도읍기의 경우 익산 왕궁리에서 발굴되고 있는 궁성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경당지구의 제의 건물지는 ‘여(呂)’자형의 건물로서 주변에 도랑을 파서 외부와 격리하고 있다.
백제의 건물지는 가람(伽藍)에 많이 남아 있다. 몇몇 사지(寺址)가 발굴 결과, 군수리사지는 목탑지(木塔址)로 생각되는 방형의 기단을 중심으로 중문(中門)•금당(金堂)•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강당을 회랑(回廊)으로 연결해 탑과 금당을 둘러싼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였다. 이와 같은 일탑식 가람배치는 금강사지(金剛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왕흥사지(王興寺址), 능산리폐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미륵사지는 발굴 결과, 중앙에 목탑이 있고 현존하는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조 동탑이 있었음이 밝혀져 3탑•3금당(三塔三金堂)이라고 하는 삼소(三所) 가람의 형식을 취하였다.
현존하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석탑이다. 석탑은 목탑에서 비롯되었는데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과 미륵사지석탑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초층(初層) 탑신(塔身)의 부재(部材)는 목조건물의 부재를 모방해 모두 다른 돌을 사용했고, 기둥 위의 3단 층개(層蓋)받침은 공포를 번안한 것이고 옥개석(屋蓋石)이 넓게 퍼져 추녀 끝이 들려 있음도 목조건축의 추녀와 같다.
조각•공예: 조각과 공예는 재질에 따라 석조, 금속공예, 토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상 조각으로는 금동불(金銅佛)과 납석상(蠟石像) 석불(石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남아 있다. 한성도읍기 불상으로는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이 있다.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는 이 좌상은 북위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서산 보원사지출토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일광삼존불상(一光三尊佛像)으로 추정되는데 북위식 복제를 하였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은 광배(光背)에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처를 추복(追福)하기 위한 명문이 있는데 산동성 제성(諸城)에서 출토된 동위(東魏)의 불상과 닮았다.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의 지하 심초석(心礎石) 부근에서는 납석제 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이 발견되었다. 부여 신리에서는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봉보주보살상은 남조와 백제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親緣性)을 잘 보여준다.

▲ 송파구 박춘희 구청장(오른쪽)과 윤영노 코리아포스트 부회장

석불은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예산 사면석불은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하고 3면에 여래입상을 각각 1구씩 조각한 것이다. 사면불(四面佛)임에도 전•후•좌•우가 모두 조각된 입체상처럼 입체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상반신은 광배와 넓은 거리를 두고 있고 팔은 따로 조각하여 부착하였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해에 면한 백화산 정상의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서 가운데에 작은 봉보주관음상(捧寶珠觀音像)을, 좌우에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여래입상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6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 지역의 유력세력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본존(本尊)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봉보주보살은 관음보살(觀音菩薩), 반가사유형보살(半跏思惟形菩薩)은 미륵보살(彌勒菩薩)로 추정된다. 7세기 작품이다. 본존은 부드럽고 친근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외에 익산 연동리의 불상에서 화려한 광배의 화염문(火焰文)과 7구의 화불의 배치는 일본 법륭사 금당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의 광배와 상통한다.
공예품으로는 도검, 장신구 및 토기•기와•전 등을 들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 제작된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데 한일고대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다. 여기에 새겨진 금상감명문은 백제에서 상감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금동관모(金銅冠帽)는 공주 수촌리에서 2점, 서산 부장리에서 1점, 고흥 길두리에서 1점, 천안 용원리에서 1점, 익산 입점리에서 1점, 나주 신촌리에서 1점 등이 발굴되었다. 금동관모의 특징은 정면이 뾰쪽하고 옆에서 보았을 때 반원형을 띠는 고깔형이다. 이 가운데 수촌리와 부장리의 것은 금동판을 투조하여 용과 봉황 등을 표현하였고 입점리와 신촌리의 것은 타출기법(打出技法)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제작 시기의 차이를 반영한다. 수촌리형의 관모는 일본의 강전선산(江田船山)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 금동신발은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고흥 길두리에서 출토되었다. 수촌리와 법천리는 투조기법(透彫技法)으로 ‘T자형’의 무늬와 용문을 새겼고 입점리나 신촌리에서는 타출기법을 사용하였다.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예의 진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금제관식(金製冠飾)•금제귀걸이[金製耳飾]•은제팔찌[銀製腕飾]•은제탁잔(銀製托盞)•두침(頭枕)•족좌(足座) 등이 출토되었다. 금제관식은 연화문,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화염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얇은 금판의 영락에 구멍을 뚫고 금실[金絲]을 꿰어 관식의 겉면을 장식하였다. 왕비의 귀걸이는 중심고리와 노는 고리에 이어 화려한 중간식, 그리고 수하식으로 이어지는 형태이다. 은제팔찌는 겉면에 두 마리의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결되었는데 비늘이나 발톱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안쪽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朱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520년라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다. 동탁은잔(銅托銀盞)은 동제 받침에 은잔을 붙인 것인데 손잡이 꼭지는 연화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고, 그 아래에 연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산과 기금과 용 등이 표현되어 있는 걸작이다.
사비도읍기의 공예품으로는 금동합(金銅盒), 장신구, 금동화판(金銅花板), 은제관식 등을 들 수 있다.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사리합(金銅舍利盒)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577년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목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공양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사리기는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은제사리호(銀製舍利壺), 금제사리병(金製舍利甁)으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8,150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공헌되었다. 이 가운데 관모는 투명한 운모와 금판을 여러 번 포개어 연화의 자방과 연판을 표현한 장식을 부착하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공에서는 금동제사리봉안기(金銅製舍利奉安記)를 비롯하여 금동제사리호(金銅製舍利壺)와 장식도자, 소형 금판 등이 출토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왕의 건강을 위해 발원하여 서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소형 금판에는 금 1만을 시주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은제관식은 좌평에서 나솔에 이르기까지 고위 관료들이 착용한 관모에 장식한 것이다. 장식의 형태는 줄기, 가지, 꽃봉오리, 꽂을 대, 꼭대기의 꽃 등으로 정형화되었다. 특히 부부가 나란히 매장된 능산리의 한 고분에서는 부부 모두가 사용한 은제화형 장식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토기는 고구려•신라의 토기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드러운 곡선과 정교한 문양, 그리고 때로는 회백색의 기표(器表)•색조(色調)에서 오는 온건한 조형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흑도(黑陶) 같은 토기가 생산되기도 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삼족기(三足器)가 만들어졌고, 후기에는 청록색 또는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시유토기(施釉土器)가 제작되었다. 이들 시유토기는 신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와당은 목조건축의 성행과 더불어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낙랑계(樂浪系)의 영향을 받았으나 6세기 중엽에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서울 광장동에서 발견된 고식의 연화문 와당을 비롯해 와당에 새겨진 모든 연화는 모가 없이 우아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한편 풍납토성에서는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한 와당이 출토되었다. 미륵사지•금강사지 등에서 발견된 연화문 연목와(椽木瓦), 부여 가탑리 출토의 귀면문(鬼面文) 연목와 등의 연화는 매우 아름다게 표현되어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녹유를 시유한 와당은 이 건물이 매우 고급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전(塼)은 묘실축조로 사용되고 있다. 전의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연화•인동문(蓮花•忍冬文) 등이 조각되었다. 표현수법은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온건•우아한 품위가 나타나 있다. 이밖에 전돌로는 부여에서 발견된 연화•인동문의 상형전(箱形塼)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방형문양전(方形文樣塼)이 있다.
회화와 서예: 백제의 회화는 고분에 그려진 벽화 및 무령왕릉 출토품에서 그 대략을 살펴볼 수 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은 벽화분인데 전축분으로 벽화를 그릴만한 자리에 진흙을 칠하고 면회(面灰)한 위에 먹과 채색으로 사신도를 그렸다. 지금은 회가 떨어지고 색이 퇴색되어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사신도는 고구려가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에는 왕비 두침에 세화(細?)가 그려져 있다. 이 세화는 두침 표면을 옻칠한 다음 귀갑문(龜甲文)을 치고 그 안에 비천(飛天)•어형(魚形)•조형(鳥形)•연화 등을 그렸는데, 어느 것이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도 생동하는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
능산리 동하총 석실분은 곱게 물갈이한 판석으로 조립한 무덤인데 네 벽에 사신도와 천장에 연화와 구름무늬가 그려졌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져 백호(白虎)의 머리부분과 연화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연화는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형식이고 운문(雲文)은 비운(飛雲)인데 꼬리가 길게 끌린 양식이 연판(蓮瓣)의 형식과 더불어 고구려와의 연관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화가로는 왜에 건너간 아좌태자(阿佐太子)와 백가가 있다. 아좌태자는 왜에 가서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을 그렸다고 한다. 한편 백제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각종 기술자와 화사(畵師)를 청해와 자신의 문화 수준을 높혔다.
백제의 서예는 기와나 돌에 새겨진 문자, 칠지도를 비롯하여 금속에 새겨진 명문, 목간에 쓰인 문자 등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전돌에 새겨진 ‘直’, 토기에 새겨진 ‘大夫’와 ‘井’이라는 글자와 토제(土製) 벼루는 백제가 일찍부터 문자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릉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의 글자는 남조와 북조의 해서(楷書)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무령왕릉 왕비 두침에 쓰여진 ‘甲’과 ‘乙’은 유려하면서 분방한 필체를 보여준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쓰여졌는데 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이다. 한편 최근에 많이 발굴되고 있는 목간에는 다양한 서체들이 쓰여 있어 서예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남사(南史)』에 의하면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이 당시 왕희지체(王羲之體)를 계승한 유명한 서예가 소자운(蕭子雲)에게 금화 수백만을 주고 30여 개의 글씨를 받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서예에 매우 심취해 있던 정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