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처음 만든 3·1절 창작곡 악보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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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처음 만든 3·1절 창작곡 악보 발굴
  • 김영목 기자
  • 승인 2018.12.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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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한글판 김영목 기자]  해방 이후 처음 찾아온 3·1절에 여학생들이 덕수궁에 모여 부른 노래의 악보가 나왔다.

정인보가 작사하고 박태현이 작곡한 현행 3·1절 노래는 1949년 총무처 공모에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보다 3년 앞선 1946년 만든 사실상 최초의 3·1절 창작곡으로 추정된다.

근현대 역사자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시간여행(대표 김영준)은 6일 역사소설가로 유명한 월탄(月灘) 박종화가 가사를 짓고 여성 작곡가 김순애가 곡을 만든 '3·1 운동의 노래' 악보를 공개했다.

자유신문사가 발행한 이 악보는 가로 23㎝·세로 31㎝ 크기며, 8장으로 구성됐다. 표지에는 운보 김기창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삽화가 있고, 상단부 왼쪽에 '경기고녀 귀중'(京畿高女 貴中)이라는 한자가 남았다.

악보 7면에는 '1946. 2. 11'이란 숫자가 있으며, 뒤표지에는 임시 정가가 5엔으로 표기됐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미군정은 초기에 원 대신 엔을 사용했다"며 "경기고녀는 경기고등여학교의 줄임말로 경기여고의 옛 명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작사자인 김순애는 경기고녀 음악 교사였고, 나중에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며 "자유신문사가 작곡가인 김순애 선생에게 보낸 악보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3·1 운동의 노래는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로 구성된 여성 삼부합창곡. 모두 3절로 이뤄졌으며, 후렴은 "무궁화 핀 삼천만리 화려한 강산/ 민족은 영원히 멸치 않는다"이다.

이 노래를 발표한 자유신문은 1945년 정인익이 창간한 일간지로, 한국전쟁 때 잠시 폐간됐다가 1961년까지 발행됐다.

자유신문은 악보에 찍힌 날짜인 1946년 2월 11일 신문에서 '여학교 연합 음악회 기념가 발표'라는 제목 아래에 악보를 싣고, 박종화와 김순애에 관한 기사를 수록했다.

▲ 사진=3·1 운동의 노래 악보 표지와 2면.(시간여행 제공)

이어 그해 2월 21일 신문은 "본사에서 선정한 3·1 운동의 노래는 학무국에서도 이날 조선 각 학교에서 기념식을 거행할 때 부르도록 결정했다"고 설명해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작곡가 김순애 지휘에 맞춘 연합 합창단 노래를 라디오로 15분간 방송한다고 밝혔다.

여학생들이 3·1 운동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1946년 3월 2일 신문에서 확인된다. 신문은 김기창이 합창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스케치 기사를 실었다.

이날 합창에는 이화여대를 비롯해 이화여고, 진명여고, 덕성여고, 숙명여고, 배화여고, 동명여고 등 여러 여학교가 참가했다.

기사는 "500여 명 합창단의 삼부합창은 곱고도 힘찬 멜로디가 혼연히 고화돼 청중의 심혼을 도취시켰다"며 "3만 청중은 우리 겨레의 평화와 행복과 자주독립 나아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뜻을 더욱 굳게 했다"고 전했다.

장유정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는 "노래를 들어보면 강렬하고 우렁차다는 느낌이 든다"며 "1946년에 여성 작곡가가 여성 삼부합창으로 만들어 여성이 불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당시 3·1절 행사는 좌우 대립으로 인해 여러 곳에서 치러졌는데, 자유신문사는 이념에 크게 치우치지 않은 언론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이 자료는 오는 9일 KBS 1TV에서 방영되는 'TV쇼 진품명품'에서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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