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방글라데시의 좋은 친구이자 개발 파트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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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방글라데시의 좋은 친구이자 개발 파트너입니다”
  • 임동훈 기자
  • 승인 2019.03.25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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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 대사 인터뷰

[코리아포스트 한글판 김형대 주필, 신진선, 손다솜, 임동훈 기자] “대한민국은 오랜 시일 동안 방글라데시의 강력한 우방국이자, 경제 및 기타 여러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개발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부터는 방글라데시에 많은 협조와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위 말은 지난 2019년 3월 20일 코리아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 대사가 한 말이다.
(참고로, 코리아포스트 미디어는 34년 전 1985년에 창간하여, 현재는 국문 2개, 영문 3개의 매체를 발행하고 있다.)

▲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가운데)과 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대사 (왼쪽)와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사는 이어 “양국 관계는 무역, 투자, 인프라 개발, 인적 자원 개발, 과학기술 등 많은 분야에서 폭넓게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으며, 방글라데시와 한국은 아시아태평양무역협정(APTA)에 가입해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 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 대사

대사와 인터뷰에서 양국의 유익하고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대사는 또한 2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자국에 진출하여 양국의 경제 협력과 우호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특히 그런 한국 기업 중 다음의 기업을 으뜸으로 뽑았다.

영원그룹, 다다무역, E-유로, 신원그룹, 창대어패럴, 한국수자원공사, 삼성공조, LS전선, 포스코대우, 삼환기업, 현대그룹, GS건설, 한국해사기술, KT, SK가스, 한독화장품, 삼영익스프레스 등이 그 대표적 기업들이다.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 다다씨앤씨 박부일 회장 신원그룹 박정주 대표 창대어패럴 박종갑 대표
한국수자원공사 삼성공조 고호곤 회장 LS전선 구자엽 회장 포스코대우 김영상 대표이학수 사장
삼환그룹 이계연 대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GS그룹 허창수 회장 한국해사기술 신홍섭 대표
KT 황창규 회장 SK가스 이재훈 대표 한독화장품 나애숙 대표 삼영익스프레스 정은구 회장

다음은 인터뷰에서 힘주어 말한 이슬람 대사의 발언 내용이다.

방글라데시 경제는 점차 한국의 경제와 통합되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와 한국의 양자 무역은 2017년~2018년에 15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2005년에 2,286만 달러였던 한국의 수출은 2017년~2018년에는 2억 5484만 달러로 성장했으며 수입도 같은 기간 크게 증가했습니다.  2018년 7월부터 2019년 12년 한국에 대한 수출은 1억 9693만 달러입니다. 수출입의 차액 균형은 주로 산업 부품과 원자재 수입으로 인해 한국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방글라데시가 2017년~2018년 한국에 수출한 주요 물품은 i)특수 직물 또는 터프트 직물, 레이스, 태피스트리 등, ii) 카펫 및 기타 섬유 바닥 덮개, iii)니트, 크로셰 원단, iv)플라스틱 및 제품, v) 함침, 접층 직물 vi) 도금 재료 제조, 바구니 세공 등, vii) 고무와 그 제품, viii) 버드스킨, 깃털, 조화, 인간 모발, ix) 알루미늄 및 해당 제품 x) 물고기, 갑각류, 연체동물, 수생 무척추 동물입니다.
방글라데시가 한국에서 수입한 물품은 i)철, 철강, ii) 플라스틱 및 제품, iii) 기계류, 기계, 원자력, iv) 원자로, 보일러; 그 일부, v) 종이와 판지, 종이 제품, vi) 펄프, 종이 또는 판지, vii) 모피, 염색 추출물, 타닌 및 그 유도체, 염료 등, viii) 철도 또는 전차선로 롤링 재고와 부품 및 부속품 이외의 차량, ix) 인조 섬유, 스트립 및 유사 섬유 소재, x) 아연과 그 외 물건들입니다.

▲ 사진=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 대사(왼쪽)가 2018년 1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수여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조인트 벤처 합작 투자 사업에서 외국인 직접투자에서 눈에 띄는 흐름을 이룩했는데 이들은 성격상 노동 집약적 입니다. 한국은 방글라데시에 외국인 직접투자를 제공하는 위치에서 3번째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한국인 외국인 직접투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7-2018년도의 총 유입액은 약 1,156만 달러에 달합니다.

방글라데시에 대한 한국 투자의 부문별 분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섬유 산업 963.63달러, 은행 7579만 달러, 가죽 6379만 달러, 기타 5999만 달러입니다. 한국 기업인 삼성이 합작 투자 회사로 방글라데시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LG도 단기간에 합작 투자를 추진할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한국은 카라치 수출 무역의 외국 독점 수출 부분을 만든 첫 투자자였으며, 그 기업들로는 의복과 기타 사업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200여 개가 넘습니다. 

한국 투자자들은 건설, IT, 의료기기 부분 투자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투자자들이 통신, ICT, 도로공사, 철강산업, 섬유, 가죽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하여 투자 관심을 갖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가장 떠오르고 있는 개발 파트너 중 하나이며, 보건, ICT, 교육, 수력, 에너지, 교통 등과 같은 방글라데시의 주요 우선 분야에 경제와 기술 협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방글라데시에 보조금과 대출 등의 형태로 자금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양자 개발 파트너로서 한국은 방글라데시에 대외경제협력기금 (EDCF)과 한국수출입은행을 통하여 자금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 가치는 약 10억 달러에 달하며 방글라데시의 31개 프로젝트에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금 지원으로, 방글라데시는 대외경제협력기금 파트너 국가중에서 한국으로부터 대출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국가로 2위에 선정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국 소프트 대출 주요 분야는 수력, 전자, 보건, 교육, 행정, ICT 등이며 한국국제협력단 (KOICA) 또한 방글라데시 내 섬유 등의 분야에 지원을 계속해서 확대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국제협력단이 다양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 시행을 위해 1994년부터 2017년까지 투자한 금액의 가치는 약 57만 달러입니다.

▲ 사진=주한 방글라데시 아비다 이슬람 대사 (우측으로부터 11번째)가 방글라데시 독립기념일 맞이하여 주한 각국 대사들과 축하 케익을 커팅하고 있다.

현재 한국국제협력단은 약 54만 달러를 보건, 교육, ICT 분야가 포함된 08 프로젝트 시행을 위해 지원하고 있으며, 2008년 7월 한국은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15개국의 숙련된 인력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현재 고용허가제 안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력은 10,000명에 달합니다.

그들은 현재 한국에서 중소기업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으며 자국으로많은 송금액을 보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몇몇은 비자를 연장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영주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는 무허가로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다양한 기술 개발 교육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교육들은 폴리텍 기관과 지원 센터를 통해 주말마다 제공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에 따르면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4년 10개월 동안 머무른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가 성공적으로 완료된 후에 그들은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며 3개월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4년 10개월을 지낼 수 있습니다.

고용구역을 바꿀 수 없는 노동자만이 이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 아래 있는 고용주는 그들의 숙식, 의료 등의 부분에 대해 비용을 내야 합니다. 주한 방글라데시 대사관은 한국의 법과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보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사관은 또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 문제 해결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아비다 이슬람 대사(왼쪽에서 세번째), 루흘 아민 일등서기관, 무함마드 상무관, 코리아포스트 이경식 회장, 파티흐 오주타르수 기자, 임동훈 부장, 손다솜 기자, 신진선 기자(순서대로)

‘아비다 이슬람’ 대사의 말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은 문헌에서 보인다.

대한민국 외무부에서는 방글라데시와 우리나라 사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서남아와 동남아를 잇는 지리적 요충 지역에 위치한 방글라데시는 최근 보도를 보면 8%에 육박하는 고도성장을 하는 나라로, 차세대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 최빈국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2018년 최빈개도국 졸업 요건을 달성했고,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급성장 중이며, 인구 약 1억 6천만 명 중 70%가 35세 이하의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향후 성장 잠재력 역시 무궁무진하다.

우리나라는 1973년 방글라데시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정치, 경제, 문화, 개발협력, 인적교류 등 다방면에서 협력을 증진해왔다. 현재 약 200개가 넘는 우리 기업이 방글라데시에 진출해 있으며, 우리나라는 방글라데시 섬유, 의류 분야의 최대 투자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 기업의 투자가 다각화되면서 인프라, 에너지, 소비재 분야로 확대되고 있어 향후 양국 간 협력관계는 더욱더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방글라데시 ‘셰이크 무지브르 라흐만’ 국부:
우리나라에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김구 선생 같이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면, 방글라데시에는 ‘셰이크 무지브르 라흐만’ (Sheikh Mujibur Rahman)이라고 불리는 ‘방글라데시 국부’ 가 있다.

▲ 봉고분두, 방글라데시의 아버지, 무지부르 라만

위키백과에 따르면, 무지부르 라흐만(1920.3.17-1975.8.15) 방글라데시국부는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 지도자로서 나중에는 2대 총리로도 잠시 재직했으며 현재 그의 장녀 셰이크 하시나 여사가 그의 정당인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을 이끌며 총리로 재직 중이다.

▲ 방글라데시 총리, 셰이크 하시나

학생 정치 지도자로서 성장하며 강력한 카리스마와 연사로 동파키스탄의 정치와 아와미 연맹에서의 영향력을 키우며 큰 지지를 얻었다. 강력한 지방 자치와 서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의 강압 정치가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1970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거 후에도 자신의 정부가 형성되지 않자 1971년 3월 26일 서파키스탄의 대통령 아히야 칸과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에게 독립 선언을 발표한 뒤 이에 서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군사 법원의 심판을 받게 되었으나 9개월 만에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승리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전인도 무슬림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진출했고 캘커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94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 참가하면서 중단된다. 1946년 이스라미아 대학생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학위를 취득했다.

동부 벵골로 돌아온 뒤 다카 대학에서 다시 법률을 공부해 동파키스탄 무슬림 학생 연맹을 설립하고 지방의 정치 지도자가 되어 2년 동안 대량 빈곤과 실업, 가난한 생활 등을 사회주의에 대한 친화력으로 극복했으며 1949년 1월 26일 정부가 우르두어가 파키스탄의 공식 언어라고 발표하자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의 전신인 아외미 연맹을 설립하고 1949년 동파키스탄 공동 총무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파키스탄의 사회주의 연합 정당 건설을 위한 노력을 했으며 1951년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파키스탄의 공식 언어가 우르두어인 것에 반대하는 벵골어 운동이 일어났고 라흐만을 포함한 많은 벵골 지역의 정치인들이 체포되었다. 1953년 아와미 연맹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동부 벵골의 입법 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정부에 항의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55년~1958년 파키스탄의 두 번째 제헌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고 1956년 산업 장관이 되어 상거래와 노동, 부정부패 퇴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1957년 사임했다. 이후 1958년 서파키스탄의 대통령 아히야 칸이 헌법을 정지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이에 대행했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1961년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
후에 야햐 칸에 반대하는 학생 지도자들로 구성된 자유 벵골 혁명 평의회란 지하 조직을 조직하다가 1962년 체포되었다.

1963년 아외미 연맹은 동파키스탄의 가장 큰 정당들 중 하나가 되어 다른 정당들과 연합해 아히야 칸의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들을 주도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서파키스탄에 대한 불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으로 이어져 1966년 라호르에서 야햐 칸의 반대 정당들과 함께 회의를 가져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 정부와 정지척, 경제적 자율성을 요구하는 6포인트 운동을 벌였다.
1970년 12월에 개최되는 선거에서 일부 부정 선거에 발생하자 1971년 3월 7일 다카에서 독립을 위한 무장 저항 시위를 벌였다. 이에 아히야 칸은 계엄령을 선포한 뒤 아와미 연맹을 금지하고 라흐만을 포함한 다른 벵골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군대에 명령했다.

이에 인도에서 훈련을 받은 동파키스탄 분리주의 군대의 주도로 1971년 3월 26일 자정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했고 라흐만은 체포되어 서파키스탄으로 이송, 군사 재판을 받았다.
라흐만은 새 국가의 임시 의회를 수립했고 전쟁으로 인한 200만 ~ 300만 명의 강간 피해자들을 위해 식품, 건강 보조기구, 기타 용품들을 지급했으며 1970년에 일어난 사이클론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남은 비방글라데시인과 서파키스탄 군대가 폭동을 일으키고 그해 말까지 수천 명의 방글라데시인이 동파키스탄으로 넘어가고 비방글라데시인들은 피난민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이에 라흐만은 미국과 유럽, 기타 국가들을 여행하며 광범위한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으며 인도의 총리 인디라 간디와 가까운 우정을 맺으며 인도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새 헌법을 작성하는 동시에 산업과 수백 개의 회사, 버려진 토지와 자본, 100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을 위해 토지 개혁을 시행했고 그 덕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기근은 근절되었다. 1973년 헌법이 선포되어 라흐만의 정당인 아와미 연맹은 절대다수의 권력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뒤이어 위생, 식품, 건강, 물, 전국의 전기 공급, 농업, 농촌 인프라와 별장 산업에 초점을 맞춘 국가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세속주의 정치를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슬람 아카데미의 부활과 이슬람 단체들의 활동은 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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