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베트남의 푸쿽섬을 다시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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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베트남의 푸쿽섬을 다시 방문하다.
  • 이근엽 박사 전 연세대학교 교수
  • 승인 2019.03.2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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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마이애미 비치의 오늘
▲ 사진=이근엽 교육학박사 전 연세대교수

[이근엽 교육학박사 전 연세대 교수] 금년 새해 첫날은 나의 80대 날들과의 고별을 의미했다. 이를 축하하려고 내 아내 뉀티 베트 홍은 “전액 장학금” 베트남여행을 제공했다. 우리 일행은 나의 고교 1학년 딸 이비자, 내 아내, 그리고 나로 구성되었다.

인천공항에서 탑승하기 전에 50대의 한 여성이 접근해 와서 몇 초 동안 나를 유심히 보았다. 즉각적으로 나는 그녀가 나의 대학 제자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정중하게 나의 나이를 물었다. “얼마 안 되어요.....90정도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남편을 불러들이더니 “이봐요. 이 어르신은 90이신데도 이렇게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하시잖아요.”라고 말하고는 81세에 작고한 자기 부친이 애석하다고 덧붙였다.

하노이에서  며칠 머무른 뒤에 내 아내는 베트남 최남단 푸쿽섬으로의 1주일간 보너스 여행을 제공했다. 나는 몹시 들떴다. 우리는 5년 전에 그 섬을 방문한 바가 있다. 우리는 300석 규모의 베트제트 에어. 콤(Vietjet Air. Com) 여객기에 탑승하였다.

한 시간 반 정도 비행한 뒤에 나는 7,000m 고도로부터 저 아래 대 메콩 삼각주의 파노라마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번쩍이는 호수들, 농장들, 그리고 미로와 같은 도로망들. 메콩 삼각주는 베트남전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전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 중의 하나다. 1965-1973 기간에 미국 전투부대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임무)의 전투장에 뛰어들어서, 60,000명의 전사자와 30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 무엇보다도 굴욕적인 패전이라는 피해를 보았다.

장엄한 에콩강(한자로는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 또는 일명 구룡강 즉 아홉 마리 용의 강)이 용트림을 하면서 아세안 해(ASEAN SEA 즉 남지나해. 남지나해는 19세기에 유럽의 지도제작가들이 붙인 이름이다)로 흘러들어 간다.

저 멀리 바닷속에 작은 반점만 한 검은 섬 하나가 겨우 눈에 띈다. 이것이 악명 높은 꼰다오 섬(프랑스말로는 풀로 콘도르 poulo condore 섬)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과 옛 남베트남 정권 시절에 수천 명의 베트남 독립투사들과 혁명가들이 이곳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 받았고, 처형되었고, 소위 “타이거 케이지(호랑이 우리”라는 지하 감방에 갇혔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살되었다.

1998년에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팜반동, 레이독토, 쭹찡 등 몇 사람의 감방을 목도했다. 그들의 각 감방에서 나는 족쇄의 쇠사슬이 한 평 정도의 콘크리트 바닥에 박혀 있는 쇠 막대기 연계되어 있음을 보았다. 팜반동님은 후에 30년 베트남전쟁 동안 내내 베트남의 국무총리로 있었다. 레이독토님은 남부 베트남의 혁명 과도정부의 외무부 장과이었는데 후에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쭹찡님은 후에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다. 나는 어린 보티사우 열사의 무덤에 헌화했다. 그녀는 16세에 구 사이공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녀의 무덤 석상에는 그녀가 감방에서 썼던 색이 바랜 플라스틱 빗과 녹슨  작은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내 눈물을 자아냈다.

하노이에서 이륙한 지 두 시간 만에 여객기는 푸쿽 공항에 착륙했다. 우리는 산허리에 있는 라 하나{La HANA} 리조트 호텔에 체크인했다. 직원 한 사람이 “HANA”는 일본어로 “꽃”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 서울에도 “HANA“ 여행사가 있다. 나는 두 개의 관계를 모른다. 또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리조트 호텔의 모든 건물은 초가지붕이었으나 객실 내부들은 별 세 개 짜리 호텔의 내부 정도로 좋았다. 모든 근무자의 서비스는 매우 전문적이었으며 인간미가 있었다.

5년 전에는 해변도로의 건설이 한참 진행 중이었으나 5년이라는 시간대는 이 부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거리의 양쪽에는 가라오케 클럽, 커피숍, 카페 식당, 인디아 식당, 해산물 식당들, 등이 즐비해 있었다. 저기 길 모퉁이에 현대(Hyundai) 자동차 대리점도 보인다. 하늘과 거리의 교통량도 엄청나다. 이곳 전체의 분위기는 남서울 강남의 그것과 같다. 저기 산 위에 패러글라이더가 보인다. 해양의 미풍은 패러글라이딩에 적합한 모양이다.

에메랄드 푸른 바다는 저 멀리 수평선까지 뻗어 나간다. 가슴 깊이의 해상(海床)은 백사장으로부터 100미터 정도까지 뻗어 나간다. 여기에서는 서핑(surfing)은 없다. 이곳 바다는 영원한 고요의 바다로서 나 같은 늙은 친구들을 위한 출렁이는 요람이었다. 샹젤리제 풍의 호텔들은 이 야자수 해변에 아름다움과 품위를 더해 준다. 우리는 대형 마모스 해변 호텔들이 건축 중임을 볼 수 있다.

타일랜드의 파타야 해변과는 달리 이곳 푸쿽 바다에는 해파리가 없다. 타이 항공 여객기는 매일 엄청난 타이 관광객들을 푸쿽으로 나른다. 이곳 식당의 음식은 방콕 식당의 음식 정도로 다채롭고 구미에 맞았다. 호주의 브리즈번 해변과는 달리 지난 한 세기 동안 이곳 푸쿽에서는 단 한 차례의 상어 떼 피습의 보도도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호주인을 만났다.

이곳 해수욕객들은 대부분 서구인이다.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루스크, 그라스노스크에서 온 여성들, 휴가차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 남부 호주에서 온 사람들,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콜론(식민지 거주자들)의 자손들, 그리고 영국인임을 자처하는 파키스탄계 영국인들 등이다.

여섯 개의 섬을 연계하는 케이블카 여행도 흥미롭다. 나는 이 군도(群島)를 플로리다의 키웨스트(Key West)에 이어 베트남의 키 사우스(Key South) 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콘도라로부터 저 아래 작은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어선을 내려다보았다.

케이블카 여행이 끝나자 우리는 고속 보트 바다 크루즈에 나서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지중해에서 산호초 위에서의 스킨 스쿠버 다이빙과 여유로운 수영을 즐겼다. 우리는 아주 격리된 해변으로 가서 또 한 차례 수영을 즐겼다. 이곳에 이름을 붙인다면 나는 로빈손 크루소 해변이라고 하겠다.

배 타고 돌아갈 때 내 입에서 한 곡조가 흘러나왔다. “다운 더 웨- 더 나이츠아 게- 앤 더 산 샤인즈 데일리 온 더 마운틴 탑....(Down the way the nights are gay and the sun shines daily on the mountain top....”, 누가 알랴, “쟈마이카 페어웰‘, 1950년대 우리의 해리 벨라폰테가 불렀던 이 카리푸소 가락을.

5년 전에 이곳을 방문한 뒤에 나는 서울에 사는 내 친구에게 푸쿽섬에 투자해서 골프 코스 하나 만들어 보라고 권했다. 여기는 정말 아시아의 마이애미 피치다. 이곳은 베트남의 경제가 고동치는 심장부인 호찌민시로 부터 30분 비행 거리 이내에 있다. 안내원은 나에게 이곳에는 몇 년 전에 개설된 18홀 짜리 골프 코스가 있는 떼 베트남인 기업가가 사장이라고 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속담 하나 더하여 보겠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아시아의 마이애미비치를, 기회의 땅 푸쿽섬을.

* 푸쿽섬 여행을 위해서는 Easterjet 인천-푸쿽 직행 항공편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근엽 박사, 전 연세대 교수는 한-베트남 사회, 인문과학 연구원 원장이며 1995년부터 The Korea Post에 기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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