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후계 문제와 남북한 관계 변화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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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후계 문제와 남북한 관계 변화 전망
  • 코리아포스트
  • 승인 2009.10.0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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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후계 문제와 남북한 관계 변화 전망

                                                                                             정 성 장 (세종연구소)

1. 문제의 제기
작년 8월 김정일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건강 이상은 이후 북한이 대내적으로 후계체계 구축을 가속화하고 올해 상반기 인공위성 로켓 발사와 제2차 핵실험 등 대외적으로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김정일이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대외적 유화적 조치를 취한 올해 8월경 김정일의 건강 상태는 1년 전에 비해 상당히 회복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이처럼 김정일의 건강 상태는 북한의 대내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북한의 비핵화를 중요한 대북 정책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과 미국 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김정일을 몇 시간 동안 만난 인사들의 증언만으로 김정일의 건강상태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없다. 그러므로 필자는 김정일의 건강 상태와 관련한 1차적인 정보를 입수한 외국기관과 국내 언론의 판단을 참고하여 김정일의 건강상태에 대해 먼저 개략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향후 북한체제 그리고 북한의 정책 변화 가능성과 관련하여 김정일의 건강상태도중요한 변수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고려 사항은 올해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의 3남 김정은(또는 김정운)의 후계체계 구축의 진전 상황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김정은 후계자설은 ‘1986년 김일성 사망설 이후 최대의 오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여전히 북한의 후계자 결정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대만의 한 사진작가가 북한을 방문하여 촬영한 김정은 선전 포스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의 후계자 지명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fact)이다.북한의 후계자 결정에 대한 국내외의 보도가 사실과 부합한다고 해도 그 동안의관련 보도가 모두 적절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김정은 후계자설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고 보도하면서도 북한에서 후계자가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해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정은이 ‘국방위원회 지도원’이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당위원회 비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들 직책이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넘어서는 지도를하고 있다는 모순된 설명을 제시해왔다. 이처럼 첩보나 정보에만 의존하여 북한의 후계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현재의 김정은의 ‘초법적’ 지위를 설명하는데 있어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고에서 후계자의 지위와 자질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북한의 후계자론을 참고하여 김정은이 현재 북한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김정은 선전 관련 북한 내부 동향에 대해, 국내 일부 언론은 특정 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을 전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양 확대해석하는 문제를 보였다. 이는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 후계자 결정 통보와 선전 활동이 권력기관의 종류, 엘리트의지위, 주민의 거주 지역 등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 결과이다. 한 지역에서 김정은에 대한 선전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성급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문제점은 북한의 후계체계 구축 현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보다 체계적이고 면밀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국내외의 언론보도뿐만 아니라 북한의 후계자론, 과거 김정일의 후계체계 구축 경험, 북한의 정책결정․집행과 파워 엘리트 체계, 그리고 탈북자 증언 등을 참고하여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이 현재 어느 단계까지 진행되었는
가를 면밀하게 분석할 것이다.김정일의 건강 상태와 북한의 후계문제에 대한 분석은 궁극적으로 한국 정부의효율적인 대북전략 수립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고의 마지막 절에서는 북한의후계문제가 남북한 관계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고,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방
향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Ⅱ. 김정일의 건강 상태 평가
김정일 총비서는 지난 7월 8일 오전 평양체육관에서 김일성 주석 15주기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하여 지난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에 이어 3개월만에 처음으로 외부세계에 거동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일은 조선중앙TV를 통해 녹화 중계된 추모대회에서 다소 다리를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입장해 주석단에 앉았으며, 대회 시작 후 일어서서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에 대한 추모묵념을 하기도 하는 등 3개월 전과 큰 변화 없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거나 앉아서 자료를 읽을 때 화면에 잡힌 그의 머리 윗부분은 카메라가 정면에서 비출 때와 달리 머리숱이 많이 빠져 있는 게 드러났으며, 행사장에 입장할 때나 앉아있을 때 대체로 무표정한 가운데 다문 입 오른쪽 꼬리가 다소 비뚤어지게 올라간
모습이 확인됐다. 이처럼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없지 않다는 점이 북한 방송을 통해
확인된 후, 미국의 워싱턴타임스(Washington Times)는 7월 9일자 기사에서 김 총비서가
지난해 뇌졸중을 앓은 이후 매우 쇠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김정일이 계속 악
화되고 있는 건강으로 인해 앞으로 1년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
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한 김정일이 최근 서양 의학에 의한 치료를 포기한 채 한약과 비전통적 요법 등 동양 의약에 의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워싱턴타임스의 보도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일보 2009년 7월 11일자의 김정일 관련 기사이다. 조선일보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김정일의 건강문제에 대해 향후 5년 동안 생존할 확률이 29%에 불과하다고 우리 당국에 통보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CIA는 김 위원장이 뇌졸중과 당뇨병의 합병증 등으로 5년내 사망 가능성이 71%에 달한다고 분석했다”고 소개했다. CIA의 이 같은 추정치는 김 총비서의 나이, 질병, 신체조건 및 뇌졸중을 맞은 시기와 그 이후의 신체조건 변화 등을, 의료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비교 분석해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CIA는 김정일의 현장 지도 사진 등 공개 정보 외에 우리 정보당국이 입수한 김정일의 뇌 사진과 고급 정보원들의 증언 등 각종 정보와 첩보를 종합해 김 총비서의 건강 상태를 지표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CIA의 판단은 객관적인 의료 정보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참고가 된다. 그러나 동일한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북한 및 외국의 최고 의료진의치료를 받고 있는 김정일과 그렇지 못한 일반인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지난 8월부터 김정일의 외부 인사 접촉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의 건강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음을 시사한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북한의 방송과 보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해서 김정일의 건강상태를 회의적으로 보는 평가가 많았지만,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8월 4일 방북하여 김정일을 직접 면담한 이후 김정일이 상당한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클린턴은 9월 21일 밤 방송된 CNN의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그가 본 김정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고 전하면서 “그가 북한에 대한 확실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도 9월 20일 CNN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결과를 토대로 “한때 사람들은 김 위원장이 (권좌에서) 멀어지는게 아니냐는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 김 위원장은
다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평양 공연을 위해 러시아 문화사절단을 이끌고 방북해 지난 9월초에 김정일을 면담한 파벨 오브샨니코브 러시아 21세기 관현악단 단장 겸 수석지휘자는 9월 15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은 기억이나 말투가 확실했다. 양손도 자유롭게 움직였고 담배도 피웠다”고 말했다. 오브샨니코브는 김정일이 자신
과 면담하는 동안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차도 마셨으며, 악수를 할 때는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고 덧붙였다.이처럼 김정일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반대로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열린북한통신 2009년 9월 16일자는 김 총비서의 뇌졸중에 대해선 “상태가 회복됐다고 한다”며 “지난 7월 이전 김정일은 주변에서 부축을 해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육체적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뇌졸중 후유증보다 더 심각한 것이 올해 5월에 당뇨합병증으로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돼 신장 투석을 1주에 2~3회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라고 소식지는 주장하고, “투석을 받기 직전에는 몸이 시들시들하고 투석을 받으면 다시 몸이 회복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이 같은 상황 때문에 김정일의 최측근들과 전문가들은 그의 수명이 길어야 5년
이내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정일은 지난 8월 1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난 데 이어, 9월 18일에는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특사인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을만났고, 10월 4일에는 방북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공항에 나가 직접 영접하는 등 8월초부터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왕성하게 많은 외부 인사들을 만나고있다. 이는 김정일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외부 인사들과만나 장시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당뇨합
병증으로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돼 신장 투석을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같
은 활동이 앞으로 몇 년간 지속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같은건강의 불안정성이 김정일로 하여금 올해 3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후계체계 구축을 가속화하며 제2차 북핵 실험을 강행한 배경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Ⅲ. 북한의 후계자론과 김정은의 위상 및 영향력
1.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이름, 나이, 학력, 경력 문제
얼마 전까지 외부 세계에 김정일의 3남 이름은 ‘김정운’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북한의 내부 자료에는 ‘김정은’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대만의 사진작가 후앙 한밍(Hanming Huang)씨가 2009년 9월 18일 원산 근교에서 찍어 인터넷 포털 ‘야후’의 사진 공유 사이트(www.flickr.com)에 9월 22일 올린 북한 포스터 사진에도 후계자의 이름이 ‘김정은’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와 관련 김정일의 3남 이름이 원래 김정은이었는데 그동안 외부 세계에 잘못 알려져 있었는지, 원래는 ‘김정운’이었는데 나중에 ‘김정은’으로 바뀌었는지에 대해 현재로서는 분명하게 단정하기어렵다. 어쨌든 북한 지도부가 김정일의 3남 이름에 대해 ‘김정은’으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김정운’ 대신 ‘김정은’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김정은은 1983년 1월 8일생으로 현재 만 26세이지만, 북한은 그의 나이를 30대 중반이라고 소문을 내고 학력과 경력도 부풀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북한 당국이 김정은의 나이를 무려 열 살이나 부풀려 35세 또는 36세로 소문을 내고 있는 것은 어린 김정은을 후계자로 앉힌 데 따른 부담이 그만큼 크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나가 외모상 30대라고 해도 크게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점도 이 같은 나이 조작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키 167cm에 몸무게는 87kg 정도로 작은 키 때문에 김정일처럼 굽높이 5cm 이상의 구두를 신고 다니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대장 계급장을 단 군복을 즐겨 입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이의 조작
선전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경쟁에 앞장서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관은 김정일에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며 올린 ‘충성의 편지’에서 “김정은 대장동지께서 보위사업을 20년간 지도하시어 … 보위사업의 영재”라고 말해 김정은의 경력도 부풀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은의 학력과 관련하여 북한 당국은 그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스위스 베른의 초등학교와 공립중학교에서 유학한 사실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김일성군사종합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은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주체의 영군술’을 비롯해 군사학을 교육받았으나 등하교를 하지는 않은 채 집에서 노동당 조직지도부부원으로 등록한 이 대학 교수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는 방식으로 졸업한 것으로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종합대학의 경우 기본 5년제 과정을 졸업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 대학 교수들로부터 수개월에서 1년 정도 단기 교육을 역시 개인교습방식으로 받았을 수는 있다고 대북 소식통들은 추정하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이 1959년에 모스크바종합대학을 직접 둘러보고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사상을 깊이 체득하고 수령님의 혁명위업을 보좌해드리면서 우리 나라 현실에서 조선혁명을 떠메고나갈 주인으로서의 준비를 갖추시려는 숭고한 충성심과 투철한 주체적 입장, 비범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은의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선전도 바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북한의 후계자론과 김정은의 위상
북한은 한국처럼 법치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권한이 직책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김정은의 현재 위상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의 추정되는 직책만 가지고 그의 위상이나 역할을 판단하는 남한중심적 접근의 한계를 극복해야한다.
후계자인 김정은의 현재 위상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령의 후계자’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북한의 후계자론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북한의 후계자론에서 주목할 것은 수령과 ‘수령의 후계자’ 모두에게 거의 동일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의하면, 수령의 후계자는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고 완성해 나가는 투쟁에서 유일지도자로서 ‘절대적인지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후계자의 절대적 지위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도침범할 수 없으며 오직 수령의 후계자만이 차지하는 신성불가침의 지위”라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서 수령의 후계자는 또한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고 완성하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이처럼 수령과 마찬가지로 수령의후계자가 ‘절대적인 지위’룰 차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수령의 후계자는북한체제에서 곧 수령 다음 가는 제2인자가 되는 것이다.
북한은 후계자를 “인민대중의 뇌수, 통일단결의 중심, 당과 혁명의 최고지도자”로서 수령의 지위를 이어나가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북한에서 수령의 대를 잇는 것은 단순히 특정 직책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의‘절대적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또한 수령의 영도가 대를 이어계승되는 것처럼 수령에 대한 충실성도 대를 이어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처럼 북한은 ‘수령의 후계자’에게 ‘절대적 지위’와 ‘결정적 역할’을 부여하고있기 때문에 김정은이 올해 1월 8일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그는 곧 북한체제의2인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정은이 북한의 모든 파워 엘리트들을 확
고하게 장악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의 공식적 위상은 일부 언론들이 그가 맡고 있다고 주장하는 ‘국방위원회 지도원’이나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당위원회 비서’ 직책 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김정일은 올해 김정은의 생일날인 1월 8일 그를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제1부부장에게 하달했다. 이에 리제강은 조직지도부의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긴급 소집, 김정일의 결정 사항을 전달한 데 이어 각 도당으로까지 후계관련 지시를 하달했으며, 고위층을 중심으로 후계자 결정
에 관한 소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후계자 결정 사실은 동시에 당중앙위원회조직지도부의 지도하에 군대 내에서 당사업을 진행하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을 통해 북한군 대좌(대령급) 수준까지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후계자로서 김정은의 활동은 지명 직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고김일성 주석의 97회 생일(4월 15일) ‘축포야회(夜會)’ 아이디어를 내고 치밀하게 준비,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 그 앞에서 시험발사를 선보여 그를 크게 감동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4월 14일 ‘강성대국의 불보라’라는 이름으로 김정일도 참석한 가운데 중국, 대만 등에서 여는 춘제 불꽃축제를 본떠 성대하게 ‘축포야회’를개최했다. 김정은은 또한 4월 20일 시작되어 지난 9월 16일 종료된 대중총동원증산운동인 ‘150일전투’도 지휘했다. 그리고 5.1절(국제노동절)날 북한 전역에서 금속공업과 연관부문의 노동자 1만 5천여 명을 평양에 불러들여 김정일과 함께 국가공훈합창단 공연과 축포야회를 비롯해 다양한 경축공연을 관람토록 하는 성대한 행사를 기획,조직했다.북한의 노동당 지도부는 김정은의 후계자 결정 사실을 주로 당과 군부 고위층을통해 이들 조직의 중간급 단위에까지만 비밀리에 전파해 오다가 5월 25일 제2차핵실험 직후에는 당과 군의 하부 단위는 물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 등행정기관들에도 공식 통보 절차를 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 지도부는 또 5월 28일해외 주재공관들에도 후계자 결정 사실을 공식 통보하면서 외부에 누설하지는 말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6월 들어 북한 노동당 지도부는 군대 병사들과 공장, 기업소 당원 등을 대상으로 매우 활발하게 김정은 ‘위대성’ 학습 강연을 진행하였다. 6월 11~13일 회령과 신의주, 평남 평성, 자강도 성간, 양강도 혜산 등에서 진행된 학습 강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은이 김정일의 선군혁명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체현하고 이를 전당과 전군, 온 사회에 철저히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선군사상으로 북한을 정치강국에 이어 군사강국, 핵대국으로 지구 위에 우뚝 서게 하기 위해 불면불휴의 노고를 다 바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둘째, 김정은을 문학예술의 천재로 내세우면서 그가 직접 지도하여 창작 완성된 작품이 가극 ‘강선의 저녁노을’, ‘은하수’라는 것이다. 또한 동평양대극장, 평양대극장을 비롯한 예술의 전당들에 대한 개건확장공사를 발기하고 그 사업을세심히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 김정은은 김정일의 사상과 영도를 온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 ‘150일 전투’를 발기하고 그를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김정은이 체육발전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이월드컵축구 본선에 참가하게 된 것도 김정은의 체육부문에 대한 세심한 지도와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성과라는 것이다.북한의 후계자론은 수령의 후계자가 “우선 사상이론의 대가로서 수령의 혁명
사상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어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지도부는 김정은의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가 김정일의 선군혁명 수상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후계자론은 또한 수령의 후계자가 “수령이 창조한 탁월한 영도예술, 혁명적인 영도방법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은 김정은이 이 같은 후계자 조건도 충족하고 있다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문학예술의 천재’로 내세우고, 김정은이 ‘150일 전투’를 지휘하고 있으며 체육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의 후계자론은 김정은에 대한 개인숭배 내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대만의 사진작가 후앙 한밍씨가 2009년 9월 18일 강원도 원산에서 찍은 포스터를 보면, 김일성과 김정은 이름 모두 빨간색으로 다른 글자들보다 큰 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북한에서 김정은이 김정일처럼 ‘수령의 후계자’로
대우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포스터를 보면, 김정일이 1974년에 후계자로 지명되고
1980년 6차 당대회까지 북한 지도부가 후계자 결정 사실을 대외적으로 감추기 위해 ‘당중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현재도 김정은의 후계자 지명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주로 ‘김대장’, 부수적으로 ‘청년대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비록 김정은이 아직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추대’되는 절차를 겪지는 못했지만, 김정일이 건강에 대한 불안감으로 올해 초에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후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이 급속도로 진행됨으로써 현재 김정은은 김정일이1974년 후계자로 지명된 직후와 비슷한 수준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3. 후계체계 구축 진전 상황과 김정은의 영향력
지난 4월 9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여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자’(제100조)로 내세웠다.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같은 조항을 근거로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이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최고직책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정헌법의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북한이 국가(공화국)가 당의 영도 하에 있는 당․국가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제11조와제100조를 결합하면,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조선로동당의 영도 하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영도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헌법 개정 이후에도여전히 조선중앙통신 등에서 김정일의 직책 중 당 총비서직을 가장 대표적인 직책으로 내세우고 있고, 김정일의 중요한 세 직책(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 중 당 총비서직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번 헌법 개정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전에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위임했던 권한의 일부를 국방위원회 위원장에게 부여한 것이다. 즉,1998년 헌법에서 국방위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국방부문의 중요 간부 임명 및 해임권한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사권을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권한으로 옮겼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다른 나라와 맺은 중요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하는 권한을 새로이 가지게 됨으로써 외교 분야에서의 공식적 권한도 더커지게 되었다.
이 같은 헌법 개정 내용은 김정일이 앞으로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는 후계자 김정은에게 맡기고, 자신은 과거 김일성처럼 국가기구, 특히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치하면서 북핵 문제와 관련한 외교와 국방 그리고 경제 관련 현지지도 등을 주로 맡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1974년에 후계자로 결정된 후 김정일이 당의 ‘조직비서’로서 당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김일성은 주석직을 가지고 주로 국가기구, 특히 중앙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통치하는 역할분담구도가 자리 잡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북한의 후계자론은 “후계자의 지도체제는 수령의 영도체계 안에서 당을 공간으로
하여 세워지게 된다. 후계자의 지도체제는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 당의 영도체계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후계자의 지도체제 수립과 관련하여 이처럼
당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북한에서 당이 “수령의 사상을 실현하고 수령의 위업을 계승해나가는 정치적 참모부”, 즉 최고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후계자론을 반영하여 현재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 관련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조직들은 당중앙위원회의 ‘기본부서’(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와 행정부 그리고 “전당의 당원들의 당생활을 지도하는 당생활지도부서이며 당중앙위원회의 참모부서”인 조직지도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 등이다.
최근 일부 언론은 ‘김정은이 성실한 간부들을 누명을 씌워 쫒아내고 그 자리에자기 세력을 심자 벌써부터 분파주의를 한다며 김정일이 화를 내면서 김정은에 대한 선전 작업이 중단되었다’는 북한 접경지역에서의 소문을 소개했다. 그리고 일부 소식지는 영도자 계승 문제가 논의되지 않고 있으며, 후계자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내용의 지시를 북한 지도부가 하달했다고 보도했다.그런데 현재 김정은은 ‘혁명의 최고참모부’로 불리는 당중앙위원회의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및 장성택 행정부장과 함께 여전히 북한 엘리트의 인사에 관여하
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김정은은 당의 과장급(한국 정부의 국장급) 이하 중간간부에 대한 인사권도 장악했고, 부부장급(한국의 차관급) 이상 고위급 간부들 인사는 김정일에게 직접 건의하여 비준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12) 그러므로 김정은의 부적절한 인사에 대한 김정일의 반발 때문에 선전 작업이 중단되었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정은이 군부와 당의 중요 정책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인사에도 관여함으로써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파워가 100이면지금 김정은의 파워는 한 20 정도”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김정은의 영향력은 현재 크게 확대되어 있으며, 시간이 경과할 것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Ⅳ. 남북한 관계의 변화 전망
1. 클린턴 방북과 북한 대외정책의 급변
지난 4월 5일 인공위성 로켓 발사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 내용이 포함된 의장성명이 채택되자 북한은 동월 14일 성명을 발표하여 북핵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114)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5월 25일 제2차 핵실험 후 유엔 안보리에서 새로운 제재 결의가 채택되자 북한은 “이제 와서 핵포기란 절대로 철두철미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었다”고 주장했다.이처럼 대외 협상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던 북한이 8월 4일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정일 총비서를 만난 후 대미, 대남정책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9월 3일에는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편지를보내 “우리는 우리 공화국의 자주권과 평화적 발전권을 난폭하게 유린하는데 이용된 6자회담구도를 반대한 것이지 조선반도 비핵화와 세계의 비핵화 그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6자회담 복귀와 비핵화 협상의 재개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만약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의 자주권과 평화적 발전권을 인정한다면 회담에 다시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조선반도 비핵화’를 부정한 적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제 와서 핵포기란 절대로 철두철미있을 수 없는 일로 되었다”고 한 이전 입장을 사실상 번복했다.
북한은 안보리 의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으며 ‘우라늄 농축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일부 상임이사국들이 제재를 앞세우고 대화를 하겠다면 우리 역시 핵억제력 강화를 앞세우고 대화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핵억제력 강화’보다는 대화 재개에 방점을 부여하고 있었다.


2. 현정은 방북 이후 북한의 대남 정책
북한의 정책 변화는 핵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대남 정책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 8월 16일 김정일 총비서를 만난 후 귀환하면서 금강산관광과 개성관광 재개, 육로 통행 제한 해제,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민간교류협력의 활성화를 가져올 조치들에 대한 북측과의 합의를 발표했다. 이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김 총비서의 최측근과 대남정책 실세들이 포함된 고위급 ‘특사’ 조문단이 남한을 방문하여 22일 현인택 통일부장관을 만나고, 23일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여 김 총비서의 구두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이명박 정부가 6.15와 10.4 남북정상합의 이행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지 않는 한
남북 당국간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던 북한이 한국정부의 입장 변화가없는 상태에서 먼저 당국간 접촉에 나서 화해 제스처를 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9월 4일자 기사를 통해 “긴장완화를 지향한다면 북, 남, 미국의 엉클어진 이해관계를 풀고 서로 맞물리도록 하여야한다”고 통미통남(通美通南) 입장을 밝혔다. 미국하고만 대화하고 남한과의 대화는 거부하는 기존의 통미배남(通美排南)의 입장에서도 탈피한 것이다.

3. 북한의 대외, 대남 정책 전환과 ‘제재 효과’
과연 이같은 북한의 대외, 대남 정책 변화를 단순히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적’ 변화라고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는 북한의 정책 변화를 ‘전략적 변화’
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전술적’ 변화라고 보기에는 변화의 폭이 너무 크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연 어떠한 요인이 이처럼 급격한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 북한의 정책 변화에 대해 “유엔결의안 1874호의 효과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과 한국에 대한 ‘유화 공세’에 착수한 것”이
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2005년 미국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계좌에 대해 제재를 가했을 때 북한이 ‘유화 공세’를 채택하는대신 핵실험을
강행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2006년 북한 핵실험 후에도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안이 채택되었지만, 당시 정책을 전환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었다. 이라크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동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서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이 퇴장하고 그 자리를 현실주의자들이 대체함으로써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북한에서도 국내정치의 변화가 대외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있다.


4. 12.1조치 이후 7개월의 명암: 후계구축 공고화와 협상파의 배제
북한은 작년 하반기에 남한 민간단체에 의한 대북 전단살포에 대한 항의 표시로 12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을 통한 육로통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올해 3월에는 미국의 식량지원을 거부하고 북한 체류 NGO 관계자들의 철수를 요구했다. 북한은 이처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작년 12월부터 올해 6월까지 김정은의 후계체계 구축을 가속화했다.김정은은 작년 11월부터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고, 12월부터는 북한 군부에서 비공개로 김정은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
다. 그리고 올해 1월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성에서 김정은을 받들자는 궐기모
임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북한 파워 엘리트들의 김정은에 대한 충성서약이 진행되고, 현재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리제강, 리용철, 김경옥 제1부부장,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의 최익규 부장과 리재일 제1부부장,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의 김정국 제1부국장과 한동근 선전부장, 국방위원회의 위원들인 장성택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수석부부장, 주상성 인민보안상 등 북한의 핵심 실세들이 김정은 후계체계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이처럼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이 진행되는 과정에 북한은 내부 결속을 위해 대외관계에서 긴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올해 6월경까지 외부세계의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고 군부 중심의 초강경 대외,대남 정책을 추구했다. 그 결과 김정은 후계체계 구
축은 조기에 안정궤도에 올라서게 되었지만, 그 시기는 북한의 대외 협상파들에게는 침묵을 강요받은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5. 후계체계 구축 환경의 변화와 북한의 정책 전환
김정은 후계체계 구축이 안정궤도에 올라서자 북한 지도부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김정은에 대한 ‘전인민적 추대’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외부세계와의 긴장보다, 인민들에게 김정은이 후계자가 됨으로써 그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고 주린 배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시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 노동당 지도부가 동원 가능한 자원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으므로 대외․대남
관계 개선을 통해 외부로부터 지원과 돈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김정일은 그 동안 내부 결속을 위해 군부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이제는 경제문제 해결과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 대외, 대남협상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그 결과 외교 분야 엘리트로서 강석주 다음 가는 김정일의 측근인 김영일 외무성부상이 8월 10일 몽골 외교당국자들과의 회담에서 “조건이 충족된다면 미국과의
대화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120)라고 말한데 이어, 같은 달 14일 베트남 방문길에서 “우리는 항상 협상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121)고 밝히는 등 미국과의 대화 재개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에는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사업부장을 특사로 파견하여 청와대를 예방하게하였다. 황장엽씨가 북한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당중앙위원회 비서들과 조직지도부 부부장들이라고 지적할 정도로 북한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는 핵심 실세이다. 비서들 중에서도 김기남 비서는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김정일의 공개 활동 수행 횟수에서 1위를차지할 정도로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다. 만약 북한의 ‘특사’ 조문단방문 목적이 조문에 그치는 것이었다면, 김 위원장의 핵심 측근으로 청와대 수석급에 해당하는 김기남 비서만 보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북한이 대남정책 최고 실세이자 최측근 인사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까지 파견한 것은 이번 기회를 남북 당국 간 대화를 복원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김양건 통일전선사업부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옆에 유일하게 배석한 인물이다. 그만큼 그는 북한의 대남정책 결
정과 관련하여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고, 그의 북한 지도부 내 실제 위상은 우리로 따지면 부총리급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이 이처럼 핵심 측근 엘리트들을 한국에 특사로 파견한 것은 남북한 관계 경색을 통해 북한이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 하에 이명박 정부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북한이 최근 대외․대남 정책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후계체계 구축의 추진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데 기인하는 측면이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은 민주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수치스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북한에서의 3대세습을 막을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한국이 3대세습을 막기 위해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핵포기 협상 대신 핵보유의 방향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데 우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처럼 한국정부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매우 제한되어 있으므로 선차적 과제와 부차적 과제, 단기적,중기적,장기적 목표를 구별하여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전략적인 접근이요구된다.

첫째, 한국정부는 북한의 비핵화와 대북 영향력 확대에 대북정책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핵포기를 위해서는 한국과 미국, 중국 등 관련국들과의 조율된 행동이
중요하다. 그리고 북한 내에서 김기남과 김양건, 장성택 등 상대적으로 실용주의적인 엘리트들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도록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 군부가 대외,대남 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상황에서는 북한의 핵포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협상파가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한국과 관련국들의 1차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북한과의 고위급 대화를 통해 김정일의 건강 등 북한 내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주요 방북 성과 중의 하나는김정일의 건강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조건이 맞으면 핵포기를 할 수 있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핵보유로 가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는 김정일이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북미관계 정상화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핵포기의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김정은이 김정각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국장을 통해 군대에 대한 지도체계를
구축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김정일처럼 확고하게 군부를 장악․통제하기까지에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에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 북한 비핵화가 후퇴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김정일의 생존시 6자회담을 통해 최소한 북한 핵폐기의 로드맵까지 도출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김정일 유고 후
김정은 정권이 출범할 경우 한국과 미국은 새 정권이 비핵화 관련 기존 합의를 준수하고,
비핵화를 진전시키는 것이 관계 유지와 개선의 기초임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새 정권을 일단 대화상대로 인정하되 만약 비핵화를 역전시키거나 거부할 경우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 관련국들과공조하여 대북 압박과 제재에 들어가게 될 것임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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