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여행] 하이든의 추억이 담긴 오스트리아 국경 마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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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여행] 하이든의 추억이 담긴 오스트리아 국경 마을을 가다
  • 김정숙 기자
  • 승인 2017.03.10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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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든의 어머니가 요리사로 일했던 하라흐 궁.

 [코리아포스트 김정숙 기자]수도 빈에서 약 45km 동쪽에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국경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인부르크(Hainburg)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이다. 사실 이 곳에서 슬로바키아 국경까지의 거리는 4km 밖에 되지 않는다.

중세 도시성벽의 성문을 통해 하인부르크 시가지 중심부에 들어서자 하이든의 흉상이 보였다. 이곳은 서양음악사에서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이든이 6살부터 8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하인부르크를 뒤로 하고 하이든이 태어난 곳을 찾아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로라우로 향했다.

이 마을에는 18세기에 세운 하라흐(Harrach) 궁이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데 합스부르크 왕조 하에서 하라흐 가문은 명문 귀족가문 중 하나로 손꼽혔다. 하라흐 궁에서 약 250m 떨어진 도로변에는 하이든의 생가가 있다. 이 생가는 원래 오두막집이었지만 깔끔하게 복원되어 지금은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하이든이 활동하던 시대에 쓰던 악기를 비롯해 하이든 가족과 관련된 당시의 서류, 악보 등이 전시돼 있어서 하이든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하이든과 그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태어났던 방은 당시처럼 재현돼 있다.

요제프 하이든은 1732년 4월 1일 만우절에 마티아스 하이든과 에바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나중에 하이든은 만우절에 놀림 당하는 것이 싫어서 생일을 3월 31일로 앞당겼다고 한다.)

그를 포함 총 12명의 형제자매 중 6명은 일찍 죽었고 살아남은 아들 세 명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는데 그 중 요제프와 동생 미하엘 하이든은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고 막내 동생 요한 에반겔리스타는 가수로 활동했다.

하이든의 어머니는 하라흐 궁의 요리사였다. 반면에 그의 아버지는 원래 하인부르크 출신으로 마차바퀴 제작 수리업자였으며 하라흐 백작의 위임으로 마을 도로 관리자 및 재판관직을 맡기도 했다.

하이든의 부모는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민속음악을 좋아해 하프를 독습할 정도로 음악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던 어린 하이든은 음악에 남다른 깊은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는 로라우 주변의 갈대숲에서 들리던 새 울음소리에 매혹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대장간 안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들려오던 망치소리도 그에겐 음악으로 들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로라우는 워낙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어린 하이든이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하인부르크의 학교장이자 성당의 음악감독이던 친척 아저씨 요한 프랑크의 제의로 그의 집에서 머무르며 음악교육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6살의 어린 하이든은 고향 로라우를 떠나 하인부르크로 향했다. 이로써 하이든은 부모의 품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어린 하이든의 하인부르크 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친척 아저씨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소리를 지르며 회초리를 휘두르곤 했다. 하이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하이든은 하인부르크 시절에 대해 친척 아저씨 집에서 밥 먹은 횟수보다 매 맞은 횟수가 더 많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하이든은 그로부터 성악 뿐 아니라 여러 악기도 배우면서 음악적으로 성장해갔다. 

그러던 중 그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기회가 찾아왔다. 하이든이 8세가 되던 1740년, 수도 빈의 슈테판 대성당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우연히 하인부르크에 들렀다가 성당의 소년 성가대에서 어린 하이든이 부르는 노래에 감명을 받고는 당장 그를 수도 빈으로 데려갔다.

하이든은 슈테판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하인부르크와는 차원이 다른 무한히 넓은 세계를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곳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생활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하이든은 9년 후에는 변성기를 맞아 소년 성가대를 그만두고 한동안 고달픈 떠돌이 음악가 생활도 했다. 이처럼 하이든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젊은 시절에 어려운 일이 적지 않았지만 삶의 후반에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로 존경받게 되었다. 

음악사에서 볼 때 그는 교향곡 뿐만 아니라 협주곡, 현악사중주와 소나타 등 고전주의 형식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는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는 그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빚을 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편 베토벤은 보잘것없는 로라우라는 촌구석의 오두막집에서 하이든과 같은 대가가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글쓴이: 정태남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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