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포스트 김백상 기자] 명장면이 아니지만 여전히 회자되는 골프 경기가 있다. 그 장면의 주인공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자신의 골프를 이어왔다. 그리고 드디어 5년만에 압도적인 기량을 펼치며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만들어냈다.
김인경은 8월 7일 새벽(한국시간) 영국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킹스반스 골프 링크스(파72 / 6,697야드)에서 끝난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 여자오픈 골프대회 최종 라운드에서 1언더파 71타를 쳐 4라운드 합계 18언더파 270타로 우승했다. 우승 상금으로 48만7천500달러(약 5억4,892만원)를 받은 김인경은 2013년 이후 4년 만에 시즌 상금 100만 달러를 넘기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최종일 2위에 6타 앞서 출발한 김인경은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번 홀(파3)에서부터 감각적인 아이언샷을 보이며 버디로 타수를 더 벌였다.
어려운 3번, 4번 홀을 안전하게 파로 세이브 하며 벌어진 타수를 유지해 나간 김인경은 전반에 이렇다할 위기 없이 플레이를 펼쳤다. 지난 3라운드 54개 홀 동안 보기를 2개만 기록한 김인경은 8번 홀(파5)에서 버디 한 개를 추가 했으나 9번 홀(파4)에서 투온에 성공하고 쓰리 퍼트 보기를 범해 전반에서 한 타를 줄이는데 그쳤다.
오후엔 기상 조건도 좋지 못했다. 이전 라운드와는 다르게 강한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선수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드라이버샷, 아이언샷 모두 안정적인 감을 유지했던 김인경은 특히 날카로운 퍼팅감각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타수를 지켜나갔다. 전반 마지막 홀 보기로 김인경은 후반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안정적으로 후반 파 행진을 이어온 김인경과는 달리 섀도프가 어느새 3타차까지 따라왔다. 섀도프는 9타 뒤진 공동 7위로 4라운드에 나섰다. 15번 홀까지 보기 없이 버디만 7개를 한 섀도프는 17번홀(파4)에서 8번째 버디를 성공시키며 2타차까지 따라오며 승부를 안개속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김인경은 맞바람이 부는 17번 홀에서 179야드를 남기고 하이브리드 클럽으로 홀 3m 옆에 볼을 보냈다. 버디 퍼트는 실패했지만 무난하게 파를 지켰다.
마지막 18번 홀 김인경은 두번째 샷을 그린에 올린 뒤에야 얼굴에 미소를 보였다. 궂은 날씨 속 쉽지않은 후반 홀을 모두 파 세이브에 성공한 김인경은 18번 홀 파퍼트를 성공시킨 후 밝게 웃었다. 투어 데뷔 10년 만에 드디어 첫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5년전 악몽 꿋꿋이 버티고 이겨낸 김인경
김인경은 2012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18번 홀을 앞두고 선두에 올랐다. 우승을 눈앞에 두고 김인경은 버디 퍼트를 했지만 홀 컵 30cm를 남기고 공이 멈춰 섰다. 2위인 유선영 선수가 9언더파로 먼저 홀아웃을 한 상황이었다. 김인경은 탭인 거리의 파퍼트를 놓치며 연장 승부를 해야했고, 18번 홀에서 이어진 연장 첫번째 홀에서 5m 버디에 성공한 유선영에게 메이저 우승을 헌납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메이저 우승을 놓친 김인경은 많은 자책 속에서 골프를 해야 했다. 모진 슬럼프도 겪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강해지며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는 강한 멘탈을 갖게됐다.
강한 정신력,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김인경
김인경은 2008년 LPGA 투어에 데뷔해 유러피언투어 3승을 포함해 이번 우승까지 더해 10승을 거두고 있다. 올 시즌엔 일찌감치 우승을 더하며 데뷔 이래 한 시즌 최다 3승을 기록 중이다. 이번 대회 우승 전까지 LPGA투어에서 6승을 기록 중이었던 김인경은 또래 친구들인 신지애, 박인비, 최나연 등에 비해 이름값이 가벼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부족한 이름값에 무게를 더했다.
김인경의 투어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주니어 시절 2005년 US주니어 대회에 박인비를 꺾고 우승하는 등 화려한 아마추어 경력을 지닌 그녀였지만 프로의 세계는 만만하지 않았다. 2006년 LPGA Q스쿨 수석 통과로 1부 투어에 입성한 그녀는 이듬해인 2007년 1.5m 퍼트를 실수해 다잡은 우승을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로레나 오초아에게 빼앗긴다.
김인경은 경기 직후 “지금 울 수도 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세계랭킹 1위와 잘 싸웠고, 이 경험으로 더 밝은 미래를 보았다.”며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1년 뒤인 2008년 10월 김인경은 LPGA 투어 첫 승을 이뤄낸다. 우승 후 그녀는 “너무 긴장해서 어젯밤 잠을 거의 못 잤다. 하지만 언젠가 우승을 할 거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에 우승한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라며 담담하게 소감을 말했다.
2008년 첫 승 이후 매해 승수를 추가하며 LPGA 투어에 적응을 마친 김인경은 2010년 우승 이후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5년 넘는 동안 우승없이 투어 생활을 이어온 그녀는 지난해 드디어 레인우드 클래식 우승으로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김인경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하며 좋은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묵묵히 재활을 이겨낸 김인경은 올 시즌 6월 4일 끝난 숍라이트 클래식 우승으로 부상 걱정을 말끔히 씻어내며 값진 우승을 해냈다. 부상 복귀 후 김인경은 더욱 단단한 경기력으로 7월 23일 끝난 마라톤 클래식에서 시즌 2승째를 거뒀다. 레이디스 스코티시 오픈에서도 톱10에 들면서 이번 메이저 대회에서의 기대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한국 선수들의 연이은 우승 행보
올 시즌 열린 LPGA투어 22개 대회 중 12개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우승을 차지하며 태극 낭자들의 매서운 기운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번 브리티시 오픈 대회까지 이미 끝난 네 개의 메이저 대회 중 3개 대회를 한국 선수들이 우승했다. 또한 7월 16일 끝난 US 여자오픈 박성현 우승을 시작으로 4연속 한국 선수 우승이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면 2015년 기록한 LPGA투어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인 15승을 넘어설 기세다. 특히 김인경과 유소연을 제외하면 매 대회 새로운 우승자가 나오면서 이러한 기대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우리 나라 선수들의 기량은 투어 내에서도 최고 수준이기에 앞으로 남은 12개 대회에서도 우승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다승 1위 김인경, 함께 출전한 한국 선수들도 선전
김인경은 시즌 세번째 우승으로 다승 1위에 나서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시즌 상금도 100만 달러를 넘기며 상금 순위 4위로 뛰어 올랐다.
김인경과 같은 한화 그룹 후원을 받는 신지은(25)이 이날 5언더파 67타를 쳐 공동 5위(12언더파 276타)로 올해 메이저대회에서 처음 톱10에 들었다.
4타를 줄인 김효주(21)도 공동 7위(11언더파 277타)에 오르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3라운드에서 64타를 몰아쳤던 박인비(29)는 최종일 한 타도 줄이지 못하고 공동 11위(10언더파 278타)에 머물렀다.
US여자오픈 챔피언 박성현(24)은 4언더파 68타를 적어내 공동 17위(8언더파 280타)로 대회를 마쳤고, 세계랭킹 1위 유소연(27)은 1오버파 73타로 부진하며 공동 43위(4언더파 284타)에 그쳤다.
한편 미셰 위(27)는 대회 첫 날 8언더파 64타 코스 레코드를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대회 2, 3라운드에서 타수를 많이 줄이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일 전반에만 버디 6개를 추가 하는 등 타수를 줄여 최종합계 13언더파 275타를 기록하며 캐롤라인 마손, 조지아 홀과 함께 공동 3위로 대회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