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2월초 서울 개최 ‘남북한유물 공동전시회’개막식에 김정은위원장 참석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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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12월초 서울 개최 ‘남북한유물 공동전시회’개막식에 김정은위원장 참석 기대”
  • 김수아 기자
  • 승인 2018.09.2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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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백승필 전시운영과장 예측

[코리아포스트 김형대 대기자]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12월초에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12월 4일부터 내년 2019년 3월 3일까지 3개월간 이곳 국립중앙 방문관에서 개최되는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남북한유물 공동전시회’에 참석,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지 않을까” 이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 코리아포스트 김형대 대기자

이 말은 오늘 9월 27일 오전 10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은 위 전시회의 설명회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백승필 전시운영과장의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광복 이후 고려의 미술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대규모 최초의 전시이다. 미국, 영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 국외 5개국 12개 기관, 한국 31개 기관 등 43개 기관에서 주요 문화재 총 390여 점이 출품된다. 관람객은 고려 미술을 한 자리에 모으는 최대 규모의 특별전을 통해 전 세계에서 오는 고려를 만나볼 수 있다.

 

 

▲ 문재인 대통령(좌측)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918년 태조 왕건은 분열된 시대를 극복하고 한반도 통일국가를 세웠다.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성을 존중한 사회였다. 주변국과도 당당히 다원적 외교 관계를 이루었고 외국인을 재상으로 등용할 만큼 개방성과 포용, 통합 정신을 갖추었다. 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코리아’라는 국명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여전히 ‘고려인의 나라’로 불릴 만큼, 고려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 역사의 5백년은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한국인 대부분은 고려의 구체적인 장소, 지명, 유적을 떠올리지 못한다.

▲ 건칠관세음보살좌상, 고려, 높이 12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남북분단이라는 불행한 근현대 역사와 관련 있다. 고려에 대한 이미지가 막연한 것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비롯한 정치, 종교, 문화, 역사의 중심지가 북한에 있어 공동체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8년에 촬영한 고려의 황궁터인 개성 만월대는 폐허로 남아 있다. [도1] 만월대는 919년 태조가 송악산 남쪽에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사진이 촬영되던 이 해는 고려가 건국한 지 천년이 되는 해였지만, 한국은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고려 천년을 기념하지 못했다. 천년을 놓친 우리에게 찾아온 천백 주년은 더욱 값지고도 절실한 시간이다.

▲ 지장보살도, 고려 14세기, 견본채색, 높이 84.5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스승과 제자의 천년만의 만남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상과 희랑대사의 만남이다. [도2, 3]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있는 <청동 태조 왕건상>은 개성 현릉에서 출토되었으며, 앉아있는 상의 높이만도 138cm에 달한다.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만들어진 왕의 초상은 사찰에 봉안되어 제례의 대상이 되었다. 태조 왕건상은 왕의 초상 조각으로 국내에서 유일한 상이다. 매납 당시 비단 옷에 허리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과대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천은 부식되고 개성 현릉 발굴 당시 청동상과 과대만 출토되었다.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희랑대사의 조각은 승려 초상 조각으로는 유일한 사례이다. 해인사에 봉안된 후 공개되지 않는 상으로 바깥으로의 최초 전시이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 시대, 수세에 몰린 왕건을 도왔으며, 고려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새긴 희랑 대사상에서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 은제 주자와 승반, 고려 12세기, 은에 도금, 주자 높이 34.3cm, 보스턴미술관 소장

태조 왕건이라는 고려의 정치적 상징과 고려의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희랑대사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 북한으로부터 온 왕과 남한에 있던 왕의 스승은 천 백년 만에 서울에서 만나기를 기대한다. 태조 왕건상,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등 북한에 소재한 문화재의 전시는 남북 분단의 아픈 현대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대장경, 인류 지혜의 보고
고려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인 ‘직지심경’을 만들어낼 만큼 오랜 출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세의 유럽 수도사의 일과가 기도와 성경을 베껴 쓰는 일로 이루어졌듯이, 고려의 승려도 경전을 직접 베껴 쓰며 사경을 제작했다. 필사의 전통에서 인쇄로의 전환은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쇄 문화는 수도원과 사찰, 성경과 경전이라는 종교의 공간, 종교의 성전을 매개로 꽃피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가 서양 문화사에 있어 하나의 혁명이자, ‘인쇄된 책의 시대’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었듯이, 대장경은 불교 성전의 총합체이자 인류의 지혜를 모은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 팔만대장경도 이번 전시에 공개된다. [도4] 경판이 보관된 해인사를 방문해도 직접 볼 수 없는 귀한 전시품이다.

▲ 청자상감국화당초문대접, 고려 12세기, 높이 6.2cm, 영국 피츠윌리엄박물관 소장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에서는 대장경을 만들지 않았다. 필사를 통해 전래되던 인류의 지적 재산이자 지혜의 숲인 5,000여 권이 넘는 대장경 전체를 나무 판에 새겨 남긴다는 아이디어는 엄청난 것이었다. 971년 송나라 태조가 시작해 983년 완성된 개보장은 송 황실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기념사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존본이 극히 적다. 고려는 총 세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업으로 대장경을 간행한다. 초조대장경은 개보장에 이어 세계 역사상 두 번째로 판각된 것으로,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이후 고려의 대장경 간행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것이 거란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 탄 후, 고려는 기존의 송본, 초초본, 거란본의 내용을 집대성한 재조대장경을 간행했다. 이때 간행한 대장경판이 무려 8만장에 이르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른다. 해인사에 700년간 보존된 팔만대장경판은 동아시아 불교 문헌을 집대성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경판이다.

▲ 희랑대사좌상, 고려 10세기, 목조건칠, 높이 82cm, 보물 999호, 합천 해인사 소장 ⓒ해인사 성보박물관

중세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위력은 지금의 핵무기 경쟁에 못지않았다. 국내적으로 대장경 간행은 국가의 총력이 드는 프로젝트로 목판으로 대량 인쇄해 이를 전국의 사찰에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다지고 국민을 통합할 수 있었다. 또한 인근 나라에 대장경을 나누어줌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대장경을 요청하고 이를 하사받는 기록, 목판을 얻고자 노력한 기록을 보면 국제정세 속에서 대장경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 고려 태조 왕건상, 청동, 고려 10-11세기, 북한 개성시 해선리 현릉 출토, 청동, 높이 138.3cm, 북한 국보,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소장

전시 구성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국제도시 개경과 왕실의 미술로 고려의 바다를 통해 드나든 다양한 물산과 교류를 살펴본다. 국제도시였던 개경에는 많은 외국인이 찾아왔다. 고려 인종이 즉위하던 1123년 6월 개경에는 송나라 사절단 일행이 도착했다. 송 휘종이 보낸 200여 명의 사절을 이끌고 온 서긍도 그 중 하나였다. 사신 서긍(1091~1153)은 고려에서 보낸 한 달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란 책에 담았다. 서긍은 보고 들은 문물을 상세히 기록하고 직접 그림을 그려 황제에게 올렸으나 4년 후 북송은 금에 의해 멸망하고, 고려도경의 그림은 전란 속에 사라져 문장만이 전하게 된다. 이국인의 눈으로 본 고려는 어떤 모습이었까? 1부에서는 지금은 찾아갈 수 없는 고려의 중심 개경과 왕실의 미술품이 공개된다. [도5]

▲ 봉서리탑 출토 직물,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부에서는 왕실과 더불어 미술품의 주된 소비 장소였던 사원의 미술을 다룬다. [도6-8] 불교는 국가 종교이자 사상이었고, 삶과 정신의 중심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고려가 이룬 문화적 성취는 불교 문화에 기반하여 정점을 이루었다. 고려 이전과 이후의 어떤 왕조도 고려만큼 불교의 정신과 가치를 이해하고 꽃피우지 못했다. 3부는 고려의 멋, 고려의 미술이다. [도9] 고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국 본토에 세워진 송(960~1279)이나 송을 멸망시키고 거란족이 건립한 요(916~1125), 여진족의 금(1115∼1234)과도 이백 년 이상 되는 시기 국교를 유지하며 교류했다.

▲ 고려의 왕궁 만월대터, 1918년 촬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사진

한편 고려의 후반기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원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당시의 외교 전쟁은 현대의 외교전 못지않게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전쟁의 길은 문화가 오고 간 교류의 길이기도 했다. 고려의 뛰어난 공예품은 기술의 수용과 교류, 서로 이질적인 것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의 미술은 도전의 역사이다. 자연으로부터 채취한 다양한 재료, 이를 가공할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은 10세기에서 14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북아시아가 이룬 공통적인 문화적 성취이다. 그러나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기술을 어떻게, 어디에 쓸 것인가의 결정이 뛰어난 예술을 만들어냈다.

대고려, 그 찬란한 미술
동북아시아에서 ‘중세’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격변하는 시기로, 활발한 물적·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역사서에는 이런 교류에 대해 단편적으로 기록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미술품은 고려가 일본·중국의 다양한 왕조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대고려전’은 미술품을 통해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국제적 관계와 교류의 과정에서 창출된 문화적 성취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세는 이성과 논리, 합리적인 세계를 지향하지만 신화와 전설, 신비한 주문 역시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의 하나로 공존했다. 고려 미술을 살펴보는 여행은 현재 시점의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여러 점에서 맞닿아 있다. 고려는 앞선 왕조가 지닌 문화적 전통을 배척하지 않고 다원적인 태도로 융합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창의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고려는 때로는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나라였다. 태조 왕건은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훌륭한 군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후대 왕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사람의 정서와 감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색과 재료, 기술적 성취를 통해 미술로 구현했다. 스승과 제자의 천 년만의 만남, 두 살짜리 딸의 장수를 비는 간절한 염원, 다음 생에는 뛰어난 명의로 사람을 구하거나 숭고한 예술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승려 화가로 태어날 수 있기를 꿈꾼 여인의 발원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도전의 결과로 인류가 모은 지혜, 완숙한 미의 정점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진행된다. 천 년 전에도 다양한 이종이 모여 뛰어난 변종을 만들어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 창의적인 사고와 영감을 불러오는 근원이 궁금하다면 이번 전시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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