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옥의 세상비평 … 언론의 공정성을 따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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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옥의 세상비평 … 언론의 공정성을 따져본다.
  • 박예선
  • 승인 2018.12.2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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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포스트 한글판 박예선 기자] 김춘옥 코리아포스트 논설위원

김춘옥의 세상비평 … 언론의 공정성을 따져본다.

김춘옥 교수

2018년 12월 24일. 예수가 약속대로 지구상에 재림하시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그날 기자들도 나오겠죠? 보도가 안 된다면 재림 취소합니다.”

언론의 막강함을 비유한 우스개 소리지만. 이랬던 예수가 재림 후 자신과 관련한 기사를 본 후 기자들에게 실망하고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을까?  예수가 재림을 취소할 수도 있을 정도로 기다렸던 기자들. 그들의 기사는 과연 예수의 마음에 꼭 들었을까?

기자들이 쓴 기사는 예수의 마음에 꼭 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기사란  ‘사실을 바탕으로 기자들이 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예수 자신이 아니다. 기자들은 사안에서 한 발 물러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다루라는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자 개개인은 지성, 감성, 인성이 각각 다르게 형성된 인간이다 예수 재림 취재 현장에 있는 기자들은 불교신자일 수도 있고, 종교적 재림을 신화적으로 해석 할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아니면 초월적 힘을 부정하거나, 아님 맹신하는 기독교신자 일 수도 있다.   

또 그 기자가 속한 매체의 성격은 기자 개인의 특징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한겨레 신문과 흔히 대비되는 조선일보가 같은 사안에 대해 정 반대의 기사, 제목, 해설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나름 공명심을 갖고 기자로 첫 발을 내밀 때 편집국 선배들은 기자는 이처럼 객관적으로 사안을 판단하고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사회과학에서 객관성 objectivity 란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학자들은 결론 지은바 있다.  단지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 의 작용이 객관성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정의에 따르면 시대나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객관성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서 객관성은 각각의 주관이 상호 작용해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예수는 자신에 관한 기사가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기사에 공정성이 결여됐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낳을지 모른다. 여러 논문이나 문헌을 보면 객관성, 공정성, 이 두 단어는 의미를 교차하고 있다. 즉 객관성이라는 단어 속에 공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고 공정성 정의 속에는 객관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공정성은 어떤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같은 취재원이나 사례만을 편향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또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작성자의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으므로 가치 중립적인 용어를 선택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어떤 사실을 생략하거나, 의견이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거나, 카메라 조작을 하는 것은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의견을 얼마만큼 보도해야 하는가도 공정성에 해당된다.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지극히 소수의 의견을 어느 정도의 비율로 보도해야 하는가, 다수의 의견이라도 옳지 않은 의견이라면 과감히 축소하는 것도 공정성을 지키는 것이다. 즉, 진실을 찾아 보도해야 하는데 진실은 산술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작성한 공정성을 인용해보자. 첫째, 중요성이나 의미가 큰 사실을 생략하는 어떠한 보도도 공정하지 않고, 따라서 공정성은 온전성을 포함한다고 했다. 둘째, 중대한 사실을 희생시키고 기본적으로는 무관한 정보를 포함하는 어떠한 보도도 공정하지 않다. 따라서 공정성은 관련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셋째, 독자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오도하거나 속이는 어떠한 보도도 공정하지 않다고 했고, 마지막으로는 '거부된', '불구하고', '인정하다', '육중한' 등과 같이 교묘하게 가치를 떨어트리는 말로 보도해서 자신들의 편견이나 감정을 숨기는 어떠한 보도도 공정하지 않다고 했다. 즉, 이 말은 보도는 겉치레 보다는 솔직성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언론에서는  생략, 오보, 과장 은 공정한 보도를 막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

우리나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제정된 방송심의규정 9조를 살펴보면 '방송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룰 때에는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나와 있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방송의 공정성이 도마에 오른 사건은 전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에 탄핵을 주도했던 당시 야당은 방송사들이 탄핵가결 순간의 국회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줬고, 또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분노에 찬 의견 역시 너무 많이 방송했다고 항의하면서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국회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집권여당 의원들이 울부짖었고 분노하는 시민의 표정은 국민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했다.

결국 언론학회에 관련 사안에 대해 공정성 여부를 판가름 해 달라고 의뢰도 했었다. 이때 언론학회의 결론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라는 애매한 듯 하지만 편향된 보도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그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학자들이 탄핵을 찬성했던 야당과 관련이 있었다는 등등의 이유로 그 보고서의 신뢰성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만약 그 당시에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이 70% 이고 찬성하는 국민이 30% 라면 그 비율에 맞게 양적 질적 보도를 해야 한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이 일치했던 것 같다. 이 같은 룰은 영국BBC 방송사의 불편부당성법칙 impartiality에 따른 것으로 이후 칼럼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공정성에 적용이 안 되는 사안이 있다. 학문적 용어로 '합의의 영역' 또는 '일탈 영역'에 속하는 사안은 공정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합의의 영역'이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사안에 대해 이미 합의한 내용으로 예를 들어 독도 관련 보도에 대해서 일본 측 주장을 방송하지 않았다고 해서 공정하지 않다고는 하지 않는다. 또 흉악범에 대해 일방적으로 매도한다고 인권침해적인 비판은 받더라도 공정치 못했다는 지적은 받지 않는다.

그리고 '일탈 영역'이란 전쟁이나 또 사회적으로 대형 사안이 생겼을 때, 예를 들어 연평도가 공격을 당하고 있는데 공격주체가 북한이라며 비방한다고 해서, 또는 주민들의 피해를 너무 많이 보도했다고 해서 공정성이 훼손됐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공정성은 합법적인 논쟁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들만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합법적 논쟁의 영역에 속하는가? 아니면 합의 또는 일탈 영역에 속해 공정성을 따질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가?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던 한 초등학교 저학년 교사가 최근에 재판에 넘겨진 사실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합의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저널리즘 전공 교수
KBS 시청자 위원회 부위원장
시사저널 국제부장
코리아 헤럴드 불어주간지 편집장
파리 제7대학교 박사
파리 제3대학교 석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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