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소환투표 놓고 '치킨게임' 양상
국제사회 중재ㆍ유가 반등 여부 주목
 

[코리아포스트 피터조 기자] 누적된 경제위기와 국민소환 투표를 둘러싼 정정불안 등 잇단 악재가 겹친 베네수엘라가 '풍전등화' 신세로 전락했다.

세계 5위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원유 가격이 급락하면서 자금 부족으로 각종 생필품을 제때 수입하지 못해 국민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야권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국민소환 투표를 추진하고 나섰고, 마두로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맞서는 등 정치적 혼란도 커지고 있다.

 

◇ 벼랑 끝 베네수엘라…"시민들, 개ㆍ비둘기까지 사냥"

한때 산유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국민은 기초 생필품과 의약품 부족은 물론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저유가에 따른 정부의 재정 수입 급감으로 거의 모든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에서 식료품이 진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때문에 식료품점 앞에서 생필품을 사려고 몇 시간씩 긴 줄을 서는 모습은 일상화된 모습이다.

외신들은 심지어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한 시민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 비둘기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베네수엘라가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앞다퉈 전하고 있다.

원자재 부족으로 그나마 베네수엘라 국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각종 생필품의 생산도 속속 중단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상공인연합회는 국내 산업의 85% 이상이 원자재 부족으로 생산이 중단됐다며 원자재, 중간재, 부품의 부족현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공급부족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고 엘 나시오날이 30일(현지시간) 전했다.

실제 코카콜라사는 최근 설탕 공급업체의 재고 부족으로 베네수엘라 공장의 생산을 잠정 중단하고, 최대 민간 맥주회사인 엠프레사스 폴라르 SA도 맥주의 핵심 재료인 맥아 보리를 살 외환이 없어 공장 가동을 멈췄다.

의약품 부족으로 가벼운 질병에도 속수무책으로 숨지는 이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시민들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비호지킨 림프종을 앓아온 초등학교 2학년생이 의약품 부족에 따른 수막염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면서 한때 석유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늘길도 막혀 고립무원의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중남미 최대 항공사인 라탐(LATAM)을 비롯해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 등 베네수엘라에 취항하는 주요 항공사들이 정치ㆍ경제위기를 이유로 항공기 운항을 중단하거나 축소했다.

수력발전 의존도가 높은 베네수엘라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전력 사정까지 급격히 나빠져 생활고를 부채질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최근 전력난으로 일부 지역에서 송전을 하루 4시간씩 중단하고 용수 공급을 제한하는 조처를 했다. 공공 부문에 주4일제 근무도 도입했다.

생필품 부족을 견디다 못해 약탈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권단체인 베네수엘라 사회갈등관측소가 집계한 약탈은 올해 1분기 현재 107건에 달한다.

 

 

◇ 국민소환 투표 놓고 마두로 대통령-야권 '치킨 게임'

경제난에 따른 민심의 반응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16년 만에 야당인 민주연합회의(MUD)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민심을 확인한 야권은 무능한 경제난 대응과 폭압 정치 등을 이유로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추진하고 나섰다.

야권은 이달 초 국민소환투표 청원에 필요한 유권자 1%(20만 명)의 아홉 배가 넘는 185만 명에 달하는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선관위가 서명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면 야권은 전체 유권자의 20%에 해당하는 400만 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 후속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국민소환 투표가 실시되더라도 마두로 대통령이 2013년 대선에서 얻은 760만 표 이상의 거부표가 나와야 마두로 대통령은 물러나게 된다.

이마저도 내년 1월 10일 이전에 치러져 가결돼야지 마두로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에 실시돼 가결되면 같은 성향의 부통령이 남은 임기를 승계한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친정부 성향의 선관위는 서명의 유효성 검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다급해진 야권과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바라는 시민들이 조속한 검증을 촉구하며 연일 시위에 나서면서 경찰과 충돌을 빚고 있다.

야권이 공세 수위를 높이고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는데도 마두로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은 채 오히려 강경하게 맞서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이 생산활동을 중단하는 기업인에 대한 처벌과 공권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정국 혼란은 파국을 향한 '치킨 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지난주에 대통령 국민소환 투표를 둘러싼 정국 혼란과 체제를 위협하는 외세 개입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다.

 

◇ 중재 나선 국제사회…원유 가격 반등 여부 주목

국민소환 투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자 국제사회가 중재에 나섰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야권은 대치 정국 해소를 위해 27일부터 사흘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남미국가연합(UNASUR)의 중재 아래 대화를 벌였다.

양측 대표단은 직접 대화 테이블에 마주앉는 방식이 아니라 중남미 전 지도자들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해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최근 현지 여론조사기관 다타날리시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연내에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70%에 달하고 있을 정도로 반감이 높아 국민소환 투표를 둘러싼 갈등을 풀 수 있는 묘안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베네수엘라를 덮친 여러 악재의 핵심 원인으로 분석되는 국제 원유 가격이 상승한다면 경제난이 다소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선 현재 배럴당 25달러 수준인 베네수엘라 원유 가격이 올해 4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차츰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한때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국제 유가가 2014년부터 급락하면서 석유 의존도가 높은 베네수엘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95%에 이를 정도다.

반면 최근 유가의 일시적 반등에도 생산량 감소로 베네수엘라 경제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만만치 않다.

IMF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성장률이 지난해 마이너스 5.7%였고 올해는 마이너스 8%, 내년에는 마이너스 4.5%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내총생산의 17%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돈을 계속 찍어내고 있는 여파로 인플레이션은 내년에 무려 1천642%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