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한국의 청년층은 좌익 이라고 해야 ‘인테리’로 통해 너 나 할 것 없이 좌익 행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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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한국의 청년층은 좌익 이라고 해야 ‘인테리’로 통해 너 나 할 것 없이 좌익 행세
  • 코리아포스트 발행인 겸 회장 이경식
  • 승인 2015.06.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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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내일 모레라서 알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결례를 무릅쓰고 이 글을 드립니다. 6.25 남침 때 서울 시민 대부분이 강북에 남겨진 채 한강다리가 폭파됐지요. 그래서 남하를 못한 많은 서울시민이 3개월간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들에게 이 ‘지도원 동무’라는 이름은 아주 잊을 수 없는 낱말이 되었습니다. 아주 고위층과 잘 나가는 사람들은 남으로 피난을 갔고 한강 이남의 사람들은 시간이 있어 거의 남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국회의원 등 높은 분들을 포함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 했습니다. 서울에서 공산당 정치를 직접 체험한 그 때 20대와 그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은 지금은 이미 타계 했거나 살아있어도 80세 전후가 되어 멸종위기에 처해있는 사람들(Endangered species)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18세였던 저도 80을 내일 모레로 내다 보면서 언제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록에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씁니다. 지난 6월 2일 지자체 선거 결과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진보성향의 사람들과 젊은 이들이 Twitter 등으로 서로 문자를 보내고 Follow해서 퍼나르고 그렇게 해서 막판에 야당에게 몰표를 안겨준 결과라고 합니다. 북한의 소행으로 확인된 천안함 격침 사건으로 46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거야!’하고 남한을 협박하는 북한의 행패를 겪는 와중에서 발생한 일이라 그것은 敵前分裂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습니다. 공산정치를 3개월간 직접 체험한 사람에게 그 상황은 만감이 교차하는 착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상황이 해방직후 미 군정때와 어쩌면 그렇게도 같습니까! 애독자 여러분도 우리나라 대통령도 그리고 대다수 우리 국민이 실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서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70대 후반이 안된 분은 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르고 계십니다. 1945년에 한반도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폈습니다. 미 군정 치하에서는 ‘조선공산당’도 ‘조선인민당’과 ‘남조선로동당’ 그리고 ‘민청,’ ‘여맹,’ ‘직맹’과 ‘전평’ 등 좌익 정당 및 등 노동 사회단체들도 모든 우익 정당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 당시 좌익 지지자 들은 우익 지지자들 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그 수가 많았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몰라도 그 당시 우리의 體感으로는 아마도 국민의 70% 정도가 좌익 또는 좌익 동조자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특히 청년층은 좌익 이라고 해야 ‘인테리’로 통했으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좌익 행세를 했지요. 한 예로, 3.1절이다, 광복절이다, 5월 1일 노동절이다 하면 축하 집회가 열리는 데 우익과 좌익이 서로 충돌과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미 군정청에서는 집회를 따로 따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통상 우익은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서 하게 하고 좌익은 남산공원에서 하도록 하였습니다. 참여율은, 놀라지 마십시요, 당시 어린 저의 기억으로도 우익단체의 서울운동장에 1만명 정도가 왔다면 좌익의 남산에는 7~8만명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남한은 국민 대다수가 다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뿐으로 일인당 국민소득이 단 60불 이었으니까 노동자의 천국 그리고 토지 무상 분배 등 달콤한 공산당의 선전이 잘 먹혀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개인소득도 북한이 남한보다는 다소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좌익이 우익보다 훨씬 그 수가 많았습니다. 미 군정이 끝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 좌익이 불법화되고 활동이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지하로 숨어버렸을 뿐 활약과 인기는 여전하였습니다.
당시 남한사람은 공산당을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들의 정치를 받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진보성향이 강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 그리고 위의 Twitter들도 그 당시 남한의 대다수의 좌익성향의 사람들과 같이 공산정치가 어떤 것인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체험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6.2 지자체 선거에서와 같은 적전분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그러자 1950년 여름 마침내 6.25가 터졌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총공격을 개시한지 3일만에 수도 서울이 그들 손에 함락되었고 불과 1~2개월만에 부산과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남한의 全域이 그들 손에 들어 갔습니다. 남한에 있는 좌익과 공산당 동조자가 많았기 때문 이였을 것입니다. 남조선로동당 박헌영 당수의 공언이 대충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는 김일성에게, ‘남침하시요, 그러면 남반부에서는 자발적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짧은 기간 내에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의견이 다른 분도 계시지만 그 당시를 직접 체험 한 사람의 기억으로는 박헌영의 장담은 다 틀린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던 것이 3개월의 공산당 정치로 인해 남한(특히 서울)의 좌익과 동조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공산정치를 받아본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이건 아니로구나!’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린거죠.
공산치하 서울에서 아침에 신문을 펼쳐보면 읽을 것이 없습니다. 로동신문, 인민일보, 민주조선 등 신문을 보면 내용이 다 똑같습니다. 먼저 김일성의 동정이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제1면의 톱 뉴스로 나오고, ‘영용한 인민군대’의 ‘赫赫한’ 戰果,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의 패전과 만행,’ 북한 노동자와 농민의 ‘생산 목표 120프로 초과 달성’ 등등의 기사가 거의 전 지면을 꽉 채웁니다.  모든 신문이 똑같고 개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Human interest story 기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로동당과 정부의 선전 선동 매체이고 관보입니다. 세상이 온통 암흑 세계 같고 가슴이 답답해 질식할 것만 같습니다.
북한에서의 상황은 지금도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마찬가지 이거나 더 악화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남한의 좌익 또는 진보성향의 사람들은 이런 신문 하루만 봐도 진저리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삐딱한 시각’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막말로 한반도가 赤化가 된다 하드래도 보수적인 사람은 인내심과 순종하는 경향이 있어 살아남을 수가 있어도 비판적인 진보성향의 사람들은 단언컨데 북한 치하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공산치하 3개월에 남한의 노동자와 농민들(원래 좌익사상이 강했던 계층)도 역시 ‘이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북한에서 파견된 ‘지도원 동무’ 때문이지요. 그 북한 ‘지도원 동무’는 남한의 논밭에서 쌀과 기타 곡물 줄기에 달린 낱알을 일일이 세고 그것으로 계산해서 일제가 그랬듯이 농민으로부터 ‘공출’을 ‘현물세’라 하여 받아 갔습니다. 모든 벼가 다 잘 자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할당량을 내고 나면 남는 곡식이 없습니다. 방금 말한 북한의 ‘지도원 동무’는 말하자면 북한이 임명 파견한 각급 조직의 실직적인 長인 것입니다. 공산치하 3개월이 아니고 더 길었더라면 그리고 만약에 끝이 없었다면, 남한 국민들은 북한 공산정권의 영원한 ‘제2국민’으로 전락하고 앞으로 수십년간, 아니 수백년간 또는 아주 영원히 북한정권의 노예 같은 신분으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북한은 남한 출신은 절대로 신임할 수가 없으며, 요직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산 치하 3개월간 서울에서는 각급 인민위원회(지금의 각급 행정 기관에 해당) 등 모든 권력기관의 長은 형식적으로는 남한 출신의 소위 ‘지방 빨갱이’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그 남한 출신 위원장 뒤에는 예외 없이 북한이 파견한 ‘지도원 동무’가 따라 붙습니다. 그리고 남한 출신의 長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실제의 권력은 북한의 ‘지도원 동무’가 행사합니다. 아마도 남한이 완전히 赤化가 된다면 남한출신의 좌익 지도층은 박헌영의 경우와 같이 숙청이 되고 지위가 낮은 남한 출신들은 영원히 그들의 하수인 그리고 국민 전체는 북의 ‘제2국민’으로 절락하여 북한 ‘지도원 동무’의 허수아비가 될 것입니다. 일제가 그랬듯이 북한 정권의 남한 출신에게는 어떤 실권도 주지 않았을 것 입니다. 공산치하 3개월간 서울에서 17세 이상의 젊은 남녀는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의용군’으로 잡혀갔고 처녀는 ‘간호병’으로 ‘공출’을 당하였습니다. 본인은 체격이 왜소한 데다 동안 이라서 ‘의용군’을 면했는데 막판에는 그도 않되서 산속에 숨어 살면서 화를 면했습니다. 공산 치하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父子지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내는 시부모나 남편보다 김일성 ‘어버이’를 더 섬겨야 하고 아들도 친부모보다 김일성에게 더 충성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를 ‘반동’으로 로동당에 고발하고 남편은 아내 앞에서 마음속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 보다는 당이 먼저이고 그보다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먼저 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공산치하 3개월에 남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렸고 북한은 남한에서 좌익 동조세력의 99%를 상실 하였습니다. 나머지 1%의 ‘순빨갱이’는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박헌영과 함께 ‘미제의 스파이’로 처형 되거나 아오지탄광으로 갔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진보적인 사람들, 특히 젊은이와 진보 성향의 야당 사람들은 공산정치의 실체를 모릅니다. 실제로 받아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지난 6.2지방 선거에서 천안함사건 그리고 그 무서운 북한의 협박을 무시한 체 야당을 찍은 것 같습니다.
북한 정권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북한의 로동신문, 인민일보, 민주조선 등 북한 신문을 직수입하게 하여 그 좌익성향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배포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개월만 보게 하면 진보의 ‘단꿈’ 그리고 막연히 동경한 북한 체제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이념 전환을 할 것입니다. 두째번 방법은 공상당 정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북한 방문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몇 일이 아니고 최소 3개월 이상 방북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금강산관광, 개성관광 그런 것 말고 북한에서 장기체류 하면서 북한을 ‘실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체재 선전을 위해 좋은 것만 보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 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북한이 좋다고 한다면 아주 그곳에서 살 수 있게 북한으로의 ‘이민’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민주국가에서 ‘거주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요? 남북 당국간 3개월간 귀국 보장을 하는 조건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공산치하에서 3개월을 겪은 본인의 경험으로 볼 때 ‘삐딱한’ 사람들 이야 말로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공산치하 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 입니다. 그 곳에 가서도 시일이 지나면 또 ‘삐딱하게’나갈 것이 분명하고 그곳 에서는 그런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나 아오지탄광行 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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