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엔소르 VS 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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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엔소르 VS 보쉬
  • 김정숙 기자
  • 승인 2016.12.2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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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종필 미술평론가.

[코리아포스트 김정숙 기자]벨기에 출신의 화가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1860-1949)는 ‘가면의 화가’로 불린다. 작품 전반에 가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그의 작품 중 50여 개의 각양각색 가면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가면과 함께 있는 자화상>은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 유명하다. 원근법을 적용한 가면 행렬들은 마치 화면 밖까지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그림 전체에 얼굴만 가득히 채운 독특한 화면구성은 일찍이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독창적 화면구성과 표현기법으로 유명한 히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에서 시도된 구도이다.

평행선 없이 밀집된 머리로만 구성한 대담한 시도의 이 그림은 보쉬의 작품 중 극히 예외적인 그림으로 손꼽힌다.

같은 주제를 다룬 보쉬의 다른 그림과 비교하면 동일 작가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들만큼 파격적이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각도의 얼굴만을 중첩했다. 수만 군중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곳에서 특정 인물(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춰 클로즈업한 느낌이다. 

<가면과 함께 있는 자화상>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는 상황은 다르지만, 표현기법과 내용, 작품의 내적인 의미 부분에서 비교할만한 요소들이 있다.

선악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대의 화가와 선악의 구분보다는 개인적 성취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가 바라본 세상은 분명하게 다르다.

보쉬가 종교적 관점에서 인류를 위해 고행의 길을 선택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뤘다면, 엔소르는 자기중심적 측면에서 인간의 무관심과 이중성을 ‘가면’이라는 소재에 대입하여 표현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 좌: 보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1515~16, 나무판에 유채, 74×81cm 헨트미술관, 벨기에 / 우 : 엔소르 <가면과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trait with Masks> 1899, 캔버스에 유채, 120×80cm 메나드미술관, 일본

선과 악 VS 악과 추

15세기 유럽은 기독교 신앙에 따른 선(善)과 악(惡)의 대조가 뚜렷했다.

이 영향으로 보쉬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그림을 통해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 지었다. 특히 악을 추(醜)와 동일시하여 표현했다.

악의 형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추악한 모습이라는 생각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그림에서 그리스도, 베로니카, 시몬(구레네 사람-십자가를 양손으로 받치고 있음)을 선으로 표현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예수의 왼쪽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쁜 도둑(화면 오른쪽 아래)처럼 흉측한 몰골을 한 악의 무리로 표현했다. 한마디로 ‘악은 추하다’라는 모델을 제공하듯 그렸다.

그림 속 추한 인물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것은 화면 중앙의 그리스도이다.

혼란스럽고 풍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보쉬의 같은 주제를 다룬 두 작품보다 숙연한 얼굴이다.

추악한 주변 인물과 극한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층 성스럽게 느끼도록 했다. 그리고 왼쪽 아래 끝의 베로니카의 수건에 찍힌 화상으로 이 그림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의 순간들을 믿게 유도하고 있다.

궁극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는 인간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의 고행이 악의 승리가 아님을 말한다.

엔소르 시대에는 보쉬 시대처럼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악을 반드시 추와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18세기 말부터 유럽에 불기 시작한 낭만주의 열풍(예,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서 인간이 겪는 비합리적인 감정과 폭력들이 예술의 주제로 등장하며 예술의 도덕적 벽이 무너졌다.

추가 미적 범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엔소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로테스크한 군중의 이미지는 여전히 악에 가까웠다.

그가 군중을 악에 가까운 추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컸다. 엔소르에게 화가라는 직업은 생활의 윤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40대 후반에 이르러 대중적 인기를 얻기까지 그의 작품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동료와 평론가의 비판도 아픔이었지만, 무엇보다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로 인생을 소비한다는 가족의 싸늘한 시선(아버지는 예외)과 냉대를 견뎌야 했다.

이렇듯 엔소르는 화가로서 무시와 멸시를 당할 때마다 그리스도가 처했던 고행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림 속 상황은 다르지만, 성난 군중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예수와 동일시한 경향이 짙다.

구세주를 몰라본 대중의 무지함이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듯이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몰라보는 대중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족과 대중은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 결과 가면과 해골로 진부한 일상을 소일하는 대중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당시 사회는 무감각하고 무감정인 인간들의 집합소쯤으로 묘사했다. 섬뜩하고 추악한 몰골들 가운데 자신만을 온전한 인간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에서 외면당한 자신을 위로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뜻과 다르게 사람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당사자는 군중심리와 달리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힐 수 있다. 자신의 잘못보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사람들의 무지함을 탓하기도 한다. 엔소르가 그랬다.

그는 예술가로서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대중을 무생명의 가면으로 표현하는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풍자했다. 화가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자기방어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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